[아침햇발] 전기요금 인상에 '폭탄'이란 표현 그만 쓰자
[아침햇발]
정남구 논설위원
지난 5월 고향의 옛집에 들렀을 때, 뒤뜰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감나무가 꽃을 피워야 할 시기인데, 잎조차 제대로 피우지 않고 있었다. 오래된 굵은 가지에서만 콩떡잎 나듯 여린 싹이 나오고 있었다. 이게 왠일이야, 했는데 밭에 가보고는 더 놀랐다. 5년 가량 키운 수십 그루 대추나무가 다 말라 있었다. 모두 지난 겨울 추위에 냉해를 입었다고 했다. ‘이상 한파’로 전라도 경상도 등 남쪽 지방에 농작물 냉해 피해가 극심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어릴 적 겨울은 매우 추웠다. 저수지가 꽁꽁 얼어서, 얼음장 위에서 편을 갈라 축구를 할 정도였다.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 지구 온난화라는 게 전라도에서 바나나를 재배하고 강원도에서 사과를 딸 정도로 자꾸 따뜻해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 실체가 ‘기후 위기’임을 실감하기는 처음이었다.
환경 포스터를 보면, 지구가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사태를 금세 떠올리게는 하지만,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게 하는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 고속으로 자전하는 지구가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듯 오염된다고 지구가 가려움이나 통증을 느끼겠는가. 정말 아픈 것은 거기 사는 사람이다. 지구가 아프다는 비유는 윤리적 책임감을 일깨울 수 있지만, 그것이 실은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우리는 비로소 누가 문제 해결 비용을 대느냐는 현실적 문제와 마주한다.
사실 인류가 오래전 제기된 ‘기후 위기’ 경고에 무감했던 것은 누가 책임을 지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비용을 치르느냐에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태를 외면하고 서로 모른 척하며 여기까지 왔다. 지금도 완벽한 합의는 없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벼랑끝에 밀려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협상을 조금씩 진척시키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염물질 배출을 직접 규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렇게 해도 길게는 오염을 일으키는 일의 결과로 편익을 얻는 사람들이 결국 그 비용을 치르게 된다. ‘석탄 발전’으로 돈을 버는 기업의 부도덕성이 대기오염의 주범 같지만, 고리를 따라가보면 석탄발전의 유인은 ‘값싼 전기요금’에서 비롯된다. 연료비가 싸다고 화석연료를 펑펑 쓰고, 천연재료로 만든 것보다 훨씬 값싼 플라스틱 제품을 마구 쓰는 소비자가 기후 위기의 최종적 책임자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국제사회의 요구와 압력에 부응해, 우리나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 탄소중립 계획’을 처음 천명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출범한 탄소중립위원회에서는 청년활동가들에 이어, 4대 종교단체의 위원들이 30일 사퇴를 선언했다. 위원회가 산업계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탄소중립으로 가는 길이 매우 험난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누가 비용을 대느냐에 합의하기는 정말 어렵다.
모든 협상에서는 ‘아쉬운 자가 샘을 판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원리가 적용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 일본 자민당 정부는 핵발전소를 재가동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일부는 재가동했지만 다수가 여전히 멈춰 서 있다.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다. 일본 시민들은 핵발전소를 가동하지 않는 비용으로 추가 전기요금을 내고 있다. 전력 생산 과정에서 탄소배출을 줄이려는 노력 또한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처음엔 기업이 부담을 지지만, 점차 소비자들이 그 부담을 모두 지게 된다. 우리도 그럴 각오를 해야 한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최근 전기요금이 무섭게 올랐다. 풍력발전을 늘려왔는데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아 발전량이 줄었고, 대체 발전에 쓰는 천연가스 등 연료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그린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온다.
우리나라에선 4분기 전기요금을 킬로와트시(㎾h)당 3원 올리기로 했다. 발전 연료비가 큰 폭 올랐지만 다 반영하지 않고, 1분기에 내린 것만 되돌렸다. 4인 가구의 월 전기요금이 1200원가량 늘어난다. 그런데도 ‘전기요금 인상 폭탄’이란 말이 나왔다. 과속 인상은 피해야 하지만, 앞으로 인상은 불가피할 것이다. 기후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야 할 ‘시민의 미덕’이 시험대에 오를 터이다. 그런데, ‘인상 폭탄’이란 표현은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제발 그만 썼으면 좋겠다.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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