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노타임 투다이', 15년 장기 근속자 위한 성대한 이별식

아이즈 ize 권구현(칼럼니스트) 2021. 9. 3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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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권구현(칼럼니스트)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

다니엘 크레이그가 '007'의 총구를 내려놓았다.

피어스 브로스넌의 뒤를 이어 다니엘 크레이그가 6번째 제임스 본드에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수많은 007의 팬들이 들고일어났다. 오랜 기간 동안 각인됐던 말끔한 슈트 차림의 능글맞은 스파이 신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악역이 더 어울릴듯한 터프한 몸매와 인상, 심지어 머리와 눈 색깔까지 비교되며 안티 팬들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007 시리즈'엔 변화가 절실했다. 어느덧 사람들은 '본드'가 아닌 '본'의 스파이 액션에 더 열광했다. '살인면허'를 들고 나라에 충성하는 '본드'가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는 '본'에 더 몰입했다. 매 작품마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들던 적재적소의 아이템들은 어느덧 전혀 새롭지 않게 됐으며, 이마저도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에 밀리는 모양새가 됐다.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연출과 플롯들로 인해 냉전 시대의 유물로까지 치부됐다.

그래서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크랙이 필요했다. 모두가 불안하게 바라봤던 무모한 도전은 보기 좋게 대성공, '카지노 로얄'로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챙기며 새로운 007의 탄생을 알렸다. 완벽한 심폐소생술이었다. 이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 '스펙터'까지 연이어 성공시켰다. 그를 비롯해 숀 코네리, 조지 라젠비,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까지, 어떤 제임스 본드가 가장 매력적이었는지를 묻는다면 각자 다른 기준과 함께 여러 이견이 있겠으나, 최고의 흥행 스파이를 꼽으라면 단연 다니엘 크레이그다. 상업 영화의 세계에 숫자만큼 정직한 것도 없다.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

29일 전세계 최초 개봉한 '007 노 타임 투 다이'라는 15년 장기근속 요원의 화려한 은퇴식을 위해 제작진이 두 팔을 걷어붙였다. 시리즈 최고 제작비 2억 5000만 달러를 쏟아부었고, 시리즈 최초로 IMAX 촬영을 시도했다. 등장하는 캐릭터도 역대 최다이며, 노르웨이-이탈리아-자메이카-영국 등 글로벌 로케이션을 펼쳤다. 더불어 거장 한스 짐머가 다니엘-본드의 마지막 여정길에 음악 감독으로 동행했다.

다니엘 크레이그를 향한 리스펙트는 무려 163분이라는 시간 동안 펼쳐진다. '가면'의 강렬한 임팩트로 매들린 스완(레아 세이두)의 과거 그리고 새로운 빌런 사핀(라미 말렉)을 소개하고, 제임스 본드의 대표 애마 애스턴 마틴 DB5과 함께 전편 '스펙터'의 끝자락과 맞물리며 시작되는 이탈리아 마테라의 오프닝 액션을 통해 '007'이 돌아왔음을 알린다. 고대 도시의 고풍스러운 풍광에서 펼쳐지는 카체이싱, 그중에서도 모토사이클 점프 액션은 영화 최고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빌리 아일리시의 몽환적인 목소리와 함께 'NO TIME TO DIE'로 귓가를 파고든다. 전통적으로 최고의 오프닝 타이틀을 자랑하는 만큼 한 땀 한 땀 새겨진 장인들의 퀄리티로 눈과 귀의 호사를 선사한다.

5년 후, MI6 007에서 은퇴한 예비역 스파이라는 설정과 함께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가 바쁘게 쓰여 진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는 다른 007들 중에서도 맨몸 액션에 강했던 스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간적인 내면도 많이 내비쳤던 인물. 하여 이번 작품을 통해 사랑, 가족, 우정 등 나랏일 때문에 불가능했던 일들을 어느 정도 보상받는다. 당장 CIA와 함께 작전을 펼치는 전직 007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리즈 팬들에겐 즐거울 일이며, 살인 면허 보유자의 흉기가 어린아이에게 사과를 깎아주는 과도로 변모하는 것 역시 새로운 재미다. 서사에 무게를 주다 보니 상대적으로 액션의 비중이 작아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건 착시 효과에 가깝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역대급 화력을 충분히 쏟아부었다. 그렇게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다니엘-본드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헌사로 영화 전체를 알차게 채워 넣었다. 하여 기존의 007 시리즈와는 다른 결로 느껴질 수 있겠으나, 다니엘 크레이그를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는 특별한 영화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

다만 '007' 시리즈는 제임스로 시작해 본드로 끝마치는 영화, 하여 언제나 그러했듯 이번 역시 제임스 본드에 집중하기에 주변 캐릭터들이 기능적으로 소모된다. 새로운 007 '노미'(라샤나 린치)와 선후배 케미는 보다 더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포인트였음에도 성의를 아꼈다. 영구결번급 번호를 받은 특급 요원인데도 대단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 또한 '팔로마'(아나 디 아르마스)와의 조우는 '본드걸'의 향수를 소환한다는 허울 아래 마초적인 눈요기에 머무른다. 나아가 시리즈를 관통하는 캐릭터 '펠릭스 라이터'(제프리 라이트)와의 재회 역시 보다 특별할 필요가 있었다. MI6와 CIA라는 특수한 관계를 떠나 본드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친구와의 마지막 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빌런 사핀의 존재감이 미약하다. 운명적인 적수임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감옥에 있는 '스펙터'의 빌런 '블로펠트'(크리스토프 발츠)의 무게감이 더 묵직하게 느껴진다.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선 16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도 다소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매들린의 비중이 풍성하고 서사를 제대로 귀결시켰다는 것이 위안거리다.

죽을 시간조차 모자랐던(No time to die) 다니엘 크레이그의 첩보 활동은 '노 타임 투 다이'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이와 함께 무려 60주년을 바라보고 있는 프랜차이즈의 상징 '007' 시리즈 역시 또 한 번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빠르게 변화하는 관객들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명성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007'이 가진 저력이다. 항상 완벽했던 것은 아니지만 위기의 순간엔 변화를 주저하지 않았고, 전통과 혁신을 조합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흥행 임무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한 축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우뚝 서 있었다. 혹평으로 얼룩졌던 '어나더데이'(2002)를 차치하면, 2000년대 '007'은 다니엘 크레이그로 대변됐다. 그렇게 세계의 평화를 책임졌던 전설적인 밀레니엄 스파이와의 이별이다. 수많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고군분투하며 전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배우, 은퇴를 번복하고 마지막까지 온몸을 내던진 그에게, 우리는 이제 뜨거운 안녕을 고한다. 

"아듀, 다니엘 크레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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