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인귀서와 답설인귀서

임기환 2021. 9. 3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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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33] 671년 7월 26일, 당나라 계림도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를 '설인귀서(書)'라고 하는데 일종의 외교문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문무왕이 답장을 보냈는데, '답설인귀서'라고 부른다. 이 두 통의 편지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만 유일하게 전해진다. 중국 사서에 전하고 있지 않아서 중국학자 중에는 그 내용의 신빙성이나 사료로서 가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내용이 갖는 적실함에서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최상의 1급 사료라고 평가된다.

'설인귀서'의 내용을 보면 문무왕이 당의 은혜를 배신한 것에 대한 힐난과 여차하면 무력으로 정벌하겠다는 협박조가 가득하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조그만 신라 땅을 위하여 중국의 군사를 일으킴에, 이익됨이 적고 쓸모없는 데 애쓰게 되었으니 어찌 그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다만 선군(先君·당 태종)의 신의를 잃을까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중략) 지금 왕께서는 편안히 할 수 있는 기틀을 버리고 떳떳한 정책 지키기를 꺼리어, 멀리는 천자의 명을 어기고 가깝게는 아버지(김춘추)의 말씀을 저버리고서 천시(天時)를 마음대로 업신여기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속이고 어기셨습니다."

당 정부가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했다는 것은 곧 정벌의 대상이 신라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계림'은 신라의 수도를 뜻하고, 당 행군총관의 이름은 곧 원정 대상이나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에 '계림도행군총관'은 최종 정벌지가 신라 수도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계림도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은 비록 당 고종의 문서는 아닐지라도 공식적인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왜 이렇게 당은 어제까지 동맹국이었던 신라에 군사적 공격을 시도하게 됐을까.

바로 백제 영토를 둘러싸고 양국 간 군사적 충돌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본 연재글 중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나당군사동맹이 맺어지는 과정을 언급한 내용을 잠시 환기해보자. 문무왕의 '답설인귀서'는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멸망시킨 뒤 양국 영토를 어떻게 분할 것인가에 대해 맺은 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을 거론하고 있음을 소개한 바 있다. 그 밀약의 내용은 평양 이남의 고구려 영토와 백제 영토를 모두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은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기미주 형태로 백제 영토를 차지했으며, 신라의 문제 제기를 못 들은 척 묵살해왔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와 당 사이에 동맹을 유지할 동기가 사라졌으며 이때부터 양국의 입장 차이는 한층 노골화됐다. 마침내 670년 군사적 충돌로 이어졌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가 고구려 장군 고연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까지 진격한 것은 백제 지역에서 당과의 결전을 앞둔 신라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신라는 670년 7월부터 백제 유민 세력과 웅진도독부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나당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신라 장군 품일(品日) 등이 백제의 63성을 빼앗았고, 천존(天存) 등이 12성을 빼앗았으며, 문영(文潁) 등이 12성을 빼앗는 등 모두 87성을 차지했다. 이듬해 671년부터는 웅진도독부를 직접 압박했다. 정월에는웅진도독부 남쪽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당 구원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신라는 서해의 웅포(甕浦)를 지켜 길목을 차단했다. 6월에는 장군 죽지(竹旨)가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밟아 당의 군량 공급에 타격을 줬으며, 이어서 석성(石城)에서 당군 5300명을 사살했고, 백제 장군 2명과 당나라 과의(果毅) 6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렇게 백제 웅진도독부에 대한 신라의 포위망은 좁혀들었고, 당 본국의 구원이 없으면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원정군의 해상 루트가 차단당한 당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당 정부는 그동안 한반도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설인귀를 복귀시켜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던 것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호부의 도호를 맡았던 설인귀는 670년 라사도행군대총관(邏娑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돼 토번(티베트) 원정에 투입됐다. 그러나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대패해 관직을 삭탈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된 바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신라군의 공세가 거세어지자 당 정부는 누구보다 한반도 사정에 밝은 설인귀를 다시 복귀시킨 것이다. 설인귀는 토번 원정의 패배로 추락된 위신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한 공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고, '설인귀서'를 보내 신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설인귀서'에 안승(安勝)과 관련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고구려 안승은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가,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사람이 반으로 줄어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나라를 맡을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인 설인귀는 누선(樓船)에 돛을 활짝 펴서 달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그가 지난날 활에 상한 새의 신세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안승을 바깥의 응원 세력이라고 여기고 계시니 얼마나 잘못입니까?"

위 글에서 '북쪽 해안'은 아마도 설인귀가 산동반도에서 백제 땅으로 향하는 경로에서 북쪽 방향인 황해도 남쪽 해안을 가르킨다. 이는 '설인귀서'를 보내는 671년 7월 시점에 안승이 한성고구려국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그리고 신라가 안승을 응원 세력이라고 여긴다는 언급에서 당시 당은 이미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의 배후에 신라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안승이 활에 상한 새의 신세가 됐다는 문장을 근거로 670년에 고간, 이근행이 거느린 원정군이 한반도에 진공해 안승 등에게 한 차례 타격을 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671년 7월에야 고간 군대가 안시성의 저항을 진압했다는 기사에서 670년에는 아직 한반도에 진공하지 못했다고 본다. 위 기사는 평양 일대에서 대규모 사민이 이뤄진 이후 쇠락해진 고구려 유민들의 사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다. '설인귀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신라를 위협하는 문장에서도 그때까지 당군의 행보를 짐작할 수 있다.

"고(高) 장군(고간)의 중국 기병과 이근행(李謹行)의 변방군사, 오(吳)·초(楚) 지방의 수군과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왕의)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 있어서 고칠 수 없는 가슴속 깊은 병이 될 것입니다."

즉 설인귀는 고간의 당군과 이근행의 말갈군, 그리고 자신이 거느린 수군 등이 신라에 대해 공격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들어 문무왕을 은근히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면 아직 고간과 이근행의 군대는 한반도에 진공하지 못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문무왕릉비 탁본 : 비가 일찍이 무너져 현재 여러 비편으로 전하고 있다.
문무왕은 '설인귀서'에 답장을 보내 설인귀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신라 측 입장을 당당하게 표명하고 있다. 특히 답장 서두에 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을 거론하면서 백제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는 신라의 군사 행도에 정당한 명분이 있음을 선언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장문의 답서는 백제와 고구려 원정 과정, 그리고 이후 웅진도독부와 관련된 내용 등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담고 있다.

그리고 설인귀가 안승을 거론하면서 신라가 고구려 부흥 세력과 손잡고 있는 점을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설인귀서'에서는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다"고만 언급하는데, 이는 곧 검모잠이 당 승려 법안을 죽인 사실을 가리킨다. 신라가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음에도 '답설인귀서'에서는 오히려 이를 진압하려는 뜻이 있었다는 식으로 시치미를 딱 떼고 있다. 백제와 웅진도독부에 대한 신라 측 입장과 관련해서는 구구절절 상세하게 당시 정황을 소개하는 내용과 대비된다. 하지만 '답설인귀서'를 보낸 이후 한반도 북부에서 벌어지는 당군의 공세에 대해 신라는 한성고구려국의 부흥군과 공동 전선을 펼치면서 적극적으로 나당전쟁을 벌인다.

'답설인귀서'는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공세가 정당하고 따라서 당의 어떠한 위협에도 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웅진도독부가 아닌 당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문무왕은 감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거대 제국인 당과의 결전을 각오하고 설인귀에게 보낸 이 문서는 신라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에서 신라인이 왜 전쟁을 선택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장문의 '답설인귀서'는 말은 공손하되 뜻은 강렬하고 굳건함을 드러내는 명문장이다. 아마도 당시의 명문장가인 강수(强首)가 지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그 문장은 강수 개인의 뜻이 아니라 당시 문무왕과 신라인 모두의 의지를 담고 있다. 당대 문장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한국 고대시기에 이런 빼어난 문장이 전해지고 있음은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께서 '답설인귀서'를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린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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