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N사피엔스]빛나는 흑체, 20세기를 열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 2021. 9. 3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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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물체는 열을 받으면 빛을 낸다. 뜨겁게 달군 쇠는 붉은 빛을 낸다. 태양도 그렇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반적으로 전자기파를 방출한다. 사람 몸에서도 열이 나기 때문에 전자기파를 낸다. 다만 그 전자기파의 파장이 길기 때문에 가시광선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몸에서 나오는 전자기파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적외선 카메라가 필요하다. 뱀 같은 동물은 그런 장비를 타고난 덕분에 먹잇감에서 나오는 적외선을 감지해 사냥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을 흡수했을 때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어떤 이상적인 물체를 상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흑체(black body)라 한다. 흑체란 한마디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전자기 복사를 전혀 반사하지 않고 완벽하게 흡수하는 이상적인 물체이다. 현실에서 이상적인 흑체에 가까운 물체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커다란 빈 통에 조그만 구멍을 하나 뚫는 것이다. 커피 텀블러의 뚜껑에 조그맣게 공기구멍이 뚫려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된다. 이런 구조의 통에서는 외부에서 빛이 들어오기는 쉬워도 한번 들어온 빛은 좁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마치 통발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텀블러의 공기구멍을 들여다보면 정말로 검다. 그래서 ‘흑체’이다.

과학자들은 19세기부터 흑체의 성질을 연구했다. 특히 흑체가 골고루 데워져 일정한 온도에 이르렀을 때 특정 온도의 흑체가 방출하는 전자기파를 분석했다. 그 결과 흑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양상은 흑체의 모양 등에 상관없이 오로지 그 온도에만 의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흑체의 온도가 정해지면 그 흑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의 단위시간당 에너지 밀도는 파장에 따라 독특한 곡선 모양을 보여준다. 즉, 긴 파장에서는 에너지 밀도가 작은 값이며 파장이 짧아질수록 에너지 밀도는 점점 증가하고 특정한 파장에서 정점을 찍은 뒤 그보다 파장이 더 짧아지면 에너지 밀도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양상을 보인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흑체. 물리적으로 가장 근사한 흑체는 작은 구멍이 뚫린 통으로 볼 수 있다. 구멍으로 들어온 빛은 통의 내부에서 여러번 반사되면서 흑체에 흡수된다. 과학동아DB

한편 서로 다른 온도의 흑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양상을 비교해 보면 우선 같은 파장에 대해서 높은 온도의 흑체가 더 많은 에너지 밀도를 방출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에너지 밀도의 정점을 찍는 파장이 온도가 높아질수록 점점 짧아진다는 점이다. 물론 에너지 밀도의 정점 자체는 온도에 따라 커진다. 이런 곡선을 흑체복사 곡선이라 부른다. 

19세기의 물리학자들이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흑체복사 곡선을 고전물리학으로 설명하는 일이었다. 전자기학이나 열역학은 19세기에 잘 정립되었기 때문에 흑체복사 곡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은 모두 마련돼 있었다. 문제는 고전역학으로는 흑체복사 곡선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짧은 파장대에서 문제가 심각했다. 긴 파장의 영역에서는 고전역학의 계산결과가 실제 관측한 곡선과 잘 맞았다. 그러나 고전역학에서는 흑체복사의 에너지 밀도가 파장이 짧아짐에 따라 계속 커져서 무한대로 발산하고 말았다. 실험결과에서처럼 파장이 짧아지면서 정점을 찍고 급격하게 감소하지 않았다. 물리학에서 무한대의 값이 나온다면 대체로 이건 뭔가가 크게 잘못됐다는 징표이다. 그래서 이 현상을 당시 과학자들은 ‘자외선 파국(ultraviolet catastrophe)’이라 불렀다. 자외선은 가시광선의 보라색 바깥쪽에 해당하는 전자기파로서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다. 그러니까 자외선 파국이란 말은 파장이 짧은 영역에서 고전역학이 망했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독일의 빌헬름 빈이 1896년에 제시한 분포함수는 짧은 파장대에서 실험결과와 잘 맞았지만 긴 파장대에서는 실험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

막스플랑크 연구소 전경. 위키피디아 제공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고전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외선 파국의 문제 또한 고전물리학의 틀 안에서 해결되리라 생각했었다. 이런 기대와 예측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틀리게 되었다. 20세기를 목전에 둔 1900년 12월, 독일의 막스 플랑크는 고전물리학과 영원히 결별하게 되는 새로운 현대물리학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바로 양자역학의 태동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물리학이나 양자역학 교과서에서는 흑체복사를 가장 먼저 다루고 있다. 

고전역학에서는 어떻게 자외선 파국이 발생했고 막스 플랑크는 이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조금 자세히 살펴보자. 고전역학에서는 흑체가 골고루 데워져 일정한 온도에 이르렀을 때 흑체 내부에서 전자기파가 정상파를 형성한다고 파악한다. 정상파란 양끝이 고정된 현이 진동하는 것과 같은 파동을 말한다. 정상파는 양끝이 고정돼 있으므로 어느 방향으로 진행하지 않은 채로 진동한다. 이때 제한된 공간 속에서 긴 파장의 정상파가 형성될 경우의 수는 아주 적다. 왜냐하면 정상파의 파장이 길어지면 그만큼 정상파의 양끝이 길기 때문에 흑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긴 파장을 맞춰 넣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별로 없다. 반면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는 긴 파장의 경우보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정상파를 형성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진다. 이 경우의 수를 모드(mode) 수라 한다.

이제 흑체가 방출하는 전자기파의 에너지는 흑체 안에서 형성되는 모두 수 곱하기 각 모드별 평균에너지를 곱하면 된다. 평균에너지는 어떤 모드가 특정 에너지를 가질 확률에 그 에너지 값을 곱한 뒤 모든 에너지에 대해 더하면 된다. 이는 복권의 기댓값을 구하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똑같다. 

여기서 어떤 정상파 모드가 특정 에너지를 가질 확률은 그 에너지에 대해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는 사실(볼츠만 분포)은 잘 알려져 있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파동의 에너지가 오로지 그 진폭에만 의존하지 파장이나 진동수와는 무관하다. 이는 우리 일상경험과도 잘 맞는다. 또한 고전물리학에서는 정상파의 에너지가 임의의 연속적인 값을 가질 수 있으므로 평균에너지를 구하는 과정은 수학적으로는 적분에 해당한다. 이렇게 해서 구한 평균에너지 값은 온도에만 정비례하는 값으로 나온다. 이 결과는 어떤 물리계가 특정 온도로 열적 평형상태에 있을 때 그 안의 입자들이 자유도 1개당 모두 똑같은 평균에너지를 갖는다는 에너지등분배법칙에 부합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흑체 내부 정상파의 평균에너지가 오로지 온도에만 정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정상파의 파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때문에 자외선 파국의 문제가 생긴다. 평균에너지는 온도에만 의존하지만 모드의 개수는 파장이 짧아짐에 따라 급격하게 커진다. 그 결과 흑체가 방출하는 에너지는 짧은 파장에서 무한히 발산해 버린다. 파장은 진동수와 역수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짧은 파장의 영역대는 큰 진동수의 영역대에 해당한다. 자외선 파국은 진동수로 말하자면 큰 진동수에서의 파국에 해당한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막스 플랑크였다. 플랑크는 임시방편적인 방법으로 정상파의 에너지가 진동수에 정비례하는 양을 가지며 전체 에너지는 이 양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플랑크는 애초에 흑체 속의 가상의 진동자의 파동을 상정하고 이것이 전자기파와 열적 평형상태를 이룬다고 가정했었다. 즉, 정상파의 에너지는 마치 진동수에 정비례하는 에너지 덩어리를 가진 입자와도 비슷하다. (파장으로 표현하자면 정상파의 에너지는 파장에 반비례한다.) 이때 진동수에 정비례하는 에너지 덩어리는 특정 진동수의 진동자가 가질 수 있는 최소단위의 역할을 한다. 진동자가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려면 이 최소단위의 개수가 많으면 된다. 이를 광양자가설이라 부른다. 

플랑크의 가설은 고전물리학과 전혀 궁합이 맞지 않는다. 첫째, 에너지가 최소단위로 덩어리져 있고 그 정수배로만 존재한다는 개념은 고전물리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파동의 에너지가 진동수에 정비례한다는 주장도 고전물리학의 관점에서는 터무니없다. 고전물리학에서는 파동의 에너지가 오로지 진폭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가설 때문에 자외선 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 왜 그런지 정성적으로 살펴보자.

열적 평형상태에서 전자기파가 특정 에너지를 가질 확률은 그 에너지에 대해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이 에너지가 파장, 또는 진동수와 무관하기 때문에 어떤 파장의 전자기파라도 에너지만 같다면 똑같은 확률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랑크의 가설에서는 진동자의 에너지가 그 파장에 반비례, 즉 진동수에 정비례하기 때문에 진동수가 커질수록 에너지가 커져서 그만큼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흑체 내 정상파의 모드 개수는 진동수의 제곱에 비례한다. 결국 큰 진동수에서는 모드 수가 많은 것보다 확률이 낮은 것이 아주 우세하기 때문에 전체 에너지가 무한대로 발산하지 않는다. 

이 결과는 대략적이고 정성적으로만 설명한 것이고 정확한 결과는 엄밀하게 수학적인 계산을 해야 얻을 수 있다. 이때 흥미로운 점은, 고전물리학에서는 정상파의 에너지가 연속적인 값을 모두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모드 당 평균에너지를 구할 때 연속적인 더하기, 즉 적분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플랑크의 가설에서는 정상파의 에너지가 진동수에 비례하는 특정한 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하므로 연속적인 덧셈, 즉 적분을 해서는 안 된다. 진짜 더하기만 해야 한다. 그 결과 모드 당 평균에너지는 고전물리학의 경우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형태를 띤다. 고전물리학에서는 평균에너지가 온도에 정비례하는 값으로 고정돼 있지만 플랑크의 결과에서는 평균에너지가 진동수의 복잡한 함수로 주어진다. 이 함수를 플랑크 곡선이라 부른다. 플랑크 곡선은 흑체복사의 실험결과와 너무나 잘 맞는다. 

플랑크의 가설에서 진동자의 에너지가 진동수에 정비례하는 어떤 최솟값의 정수배로만 존재한다고 했는데, 그 에너지 최솟값을 결정하는 비례상수가 바로 플랑크 상수이다. 플랑크 자신은 자신의 가설에 대해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플랑크에겐 그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수학적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플랑크의 생각과는 달리 플랑크의 가설은 결국 새 시대를 열어젖힌 황금열쇠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플랑크 상수는 양자역학 전체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자연의 상수가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플랑크는 훗날에도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는 양자역학의 정통적이고 핵심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플랑크는 여전히 양자역학의 출발점이라 할 만하다. 물리학의 20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막스 플랑크. 그가 제안한 '양자 가설'은 양자역학을 낳고, 인류의 자연관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위피키디아 제공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 jongphil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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