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길] 천복을 좇는 삶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2021. 9. 3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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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학을 졸업한 뒤 건축기계설비기사로 공사 현장을 누빔.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에서 교학을 공부하다 인도로 떠남. 푸나대 대학원에서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각각 석사 학위를 받음. 푸나대 데칸칼리지에서 논문 ‘인도와 중국의 영웅신화 비교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함. 귀국한 뒤 수행과 집필을 병행하며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고전 등을 강의하다 다시 막노동….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공동체에서 신화를 강의하는 어느 학자의 이력입니다. 일찌감치 기계설비기사로 공사판을 전전했으니 남자일 거라고요? 아닙니다. 가냘픈 여성입니다. 그런 그가 거친 공사판에 뛰어든 것은 벌이가 좋아서였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움직이고 싶었습니다. 젊은 그가 보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돈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러나 1999년, 수십명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숨져간 씨랜드수련원 화재와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는 그가 건축판에서 마음 편하게 돈 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저 어린 사람들의 떼죽음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명리학과 주역 책을 독파하다 대학원에 진학해 불교 교학을 공부했지요. 그래도 답을 얻지 못한 채 인도로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본격 여행을 시작하기 전, 영어부터 좀 공부해야겠다고 들른 푸나대학에서 그는 뜻밖에도 현자를 만납니다. 산스크리트어 고전 전집을 통째로 머리에 담아 둔 학자이자 요가 수행자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현자의 삶 역시 늘 흔들리고 평범했지만 또한 완벽했습니다. 제자되기를 자청해 수행과 인도 고전을 배웠습니다. 공사판에서 일했지만 몸은 부실했나 봅니다. 기껏 15분 명상하는데도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구부정한 자세를 바로잡는 데만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걸핏하면 위경련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몸으로 난해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익혀 석사 학위를 2개나 받고 급기야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습니다, 학업과 동시에 정진한 수행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요가는 몸의 건강만을 위한 운동법은 아니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요가의 본뜻은 하나로 묶는 것, 결합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기, 인간과 신이 일체되기, 지금 여기에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존재하기,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그러니까 고통과 맞짱뜨며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즈냐나(지혜) 요가의 최고수였고, 십자가에 못 박혀 가며 인간을 사랑한 예수는 박띠(헌신) 요가의 거장이었습니다.

불교에서 힌두교로, 팔리어 삼장에서 산스크리트어 베다로, 철학에서 신화로, 즈냐나에서 박띠로 그의 관심사와 공부는 건너뛰기를 거듭했습니다. 1년을 생각했던 여정은 14년으로 늘어났습니다. 그사이에 깨달은 게 있었습니다. 구원은 신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칼 융과 조지프 캠벨 등의 안내를 받으며 신화를 다시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신화는 길을 잃고 헤매던 그가 걸어야 할 길을 알려주는 지도요, 나침판이었습니다.

그가 강의하기도 하는 캠벨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은 세계의 신화와 종교, 전설, 민담에 등장하는 영웅을 모아놓고 이들이 스스로 입을 열게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신화의 원형이 되는 하나의 영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탄생시킵니다. 비정상적으로 태어나고, 환난을 겪고, 방황하며 모험의 길을 떠나고, 조력자를 만나고, 결정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떠났던 자리로 돌아오는 영웅.

아이들이 떼죽음을 하든 말든 사람들이 우르르 돈을 따라갈 때 그는 내려놓고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돌아온 지 5년. 쉽잖은 현실에 흔들리며 공사판을 기웃거리기도 하던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습니다. 고금의 신화를 강의하며 천복(Bliss)을 좇는 삶을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평화로운 결기가 보입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과 더불어.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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