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당신의 '인생책'은 뭔가요

고영직 문학평론가 2021. 9. 3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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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다만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똑똑한 나쁜 놈’이 되어버리는 역설이 자주 성립되는 이 땅의 교육 현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그렇다.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길이 있다. 입신출세를 하기 위해 읽는 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나이 듦을 성찰하며,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읽는 책을 뜻한다. 지난해 서울시민대학 전공세미나 과정에서 만난 송영구씨가 그런 경우였다. 1957년생 닭띠인 송씨는 1차 베이비부머에 속하는 세대로서 오로지 한 직장에서만 33년간 일하다 2017년 퇴직했다. 위암 발병 때문이었다. 송씨는 33년 동안 한 직장에서만 근무했다. 이 기간 중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연합, 말레이시아 등 8개국 11개 해외현장에서만 무려 22년을 근무했다. 송씨가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책읽기였다. 특별한 목적 없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러셀과 니체 같은 철학자의 책을 비롯해 고전, 대중소설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그런 고독의 시간은 고립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 송씨가 50대 초반에 만난 책이 바로 <스콧 니어링 자서전>(실천문학사, 2000)이었다. 반골 100살을 산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은 소로의 <월든>과 더불어 자서전문학의 모델이 되는 책이다. 스콧 니어링은 아내 헬렌 니어링과 함께 평생을 반전평화주의자로 살았고, ‘즐거운 불편’ 생활을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송씨가 스콧 니어링 자서전에 매료된 것은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며 살려는 원칙주의자의 면모 때문이었다. 강연 투어를 할 때 여행에 소요되는 경비 외에는 주최 측에 돌려주고 농산물을 대신 받아가는 장면에도 매료되었다.

그날 이후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송씨의 ‘인생책’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퇴직 이후 서울과 강원도 홍천을 오가며 스콧 니어링처럼 ‘자급농’의 삶을 살고자 한다. 초짜 농부이지만, 농작물 기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은퇴 이후 송씨 삶을 돌아보면 스콧 니어링이 자기 인생을 ‘인생역경대학’이라고 명명한 것 못지않다. 송씨 또한 하루 생계를 위한 노동 네 시간, 지적활동 네 시간, 공동체에서의 친교와 봉사활동 네 시간이라는 스콧 니어링의 생활 원칙을 책상에 붙여두고 늘 그렇게 살고자 한다. 서울시민대학이 지난해 처음 개설한 전공세미나 과정에 참여해 올해 3월 출중한 ‘자서전’을 집필하고 58명의 졸업생과 함께 시민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해부터 지켜본 송영구씨의 인생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져준다. 무엇이 삶의 격(格)인지 또한 생각하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50플러스의 시간에 만나는 한 권의 ‘인생책’이 작은 변화의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 가을, 지난해 작고한 김종철 선생이 번역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녹색평론사, 2007)를 더듬어 본다. 육체, 장소, 시(詩)로의 귀환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시골 농부가 된 리 호이나키의 삶은 40대 초반에 접한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당신의 인생책은 무엇입니까.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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