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차기 총리 기시다는… 자기주장 모호, 정계 별칭 ‘가장 재미없는 男’

도쿄/최은경 특파원 2021. 9. 29.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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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차기 총리 예약한 기시다는?
“남의 얘기 듣는 게 나의 장점”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인’ 평판
히로시마서 중의원 3대째 세습
9선 의원으로 큰 굴곡 없이 출세
한일관계 중시하는 파벌의 수장
아베 정권서 외무상 4년 7개월
29일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기시다 후미오가 자민당 총재자리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 현 총리에게) 패배한 뒤 ‘기시다는 이제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나는 달라졌다. ‘전투적이지 않다’ ‘싸우려는 자세가 안 됐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젠 아니다.”

지난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총리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4)가 일본 총리에 오른다. 기시다는 29일 자민당 총재 선거 결선 투표에서 고노 다로 행정규제개혁상을 제치고 압승했다. 오는 4일 임시국회 지명 투표 뒤엔 일본 총리로 선출된다. 그는 당선 직후 연설에서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기시다 후미오의 장점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힘’”이라며 “여러분과 함께 열린 자민당, 밝은 일본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래프

기시다는 자민당의 전형적인 ‘세습 도련님’ 정치인이다. 도쿄 시부야구 출생이지만 본적은 히로시마로, 3대가 모두 원폭 피해지 히로시마에서 중의원을 지냈다. 도쿄대를 목표로 한 3수(修) 실패로 와세다대에 입학한 것을 제외하면 큰 굴곡 없이 출세가도를 달렸다. 대학 졸업 후 장기신용은행에서 5년간 근무했고, 1987년 당시 중의원이던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부친이 사망한 뒤 아버지의 선거구(히로시마 1구)를 물려받아 1993년 첫 당선됐다. 지금은 9선으로 자민당 히로시마 세력의 핵심 인물이다.

2001년 고이즈미 내각에서 문부과학성 부대신에 임명된 뒤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7년 아베 신조 전 총리의 1차 집권 때 ‘오키나와 및 북방대책담당상’으로 내각에 처음 입성했고, 2차 집권 때인 2012년엔 외무상으로 임명됐다. 2017년까지 약 4년 7개월간 외무상을 지내며 전후 최장 재임 외무상 기록을 세웠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도출해 냈고, 2016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지 방문도 이끌어냈다.

그는 외무상에서 물러난 뒤 자민당 요직으로 손꼽히는 정무조사회장을 맡았다. 인지도를 높이는 데 더 큰 도움이 되는 자리여서 ‘총리를 염두에 둔 행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베는 총리로 재임할 때 기시다를 자신의 후임으로 꼽으며 “정말 성실하다. 상대방을 존중하기에 기시다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고 높게 평가했다. 두 사람은 1993년 중의원 당선 동기로, 건강 문제 때문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아베 대신 기시다가 ‘흑기사’로 나서서 모두 마셨다는 이야기도 일본 정계에서 회자된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프로필

그는 자신의 강점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힘’을 강조한다. 이번 총재 선거 출마 기자회견에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은 일명 ‘기시다 노트’를 들고 나와 “지난 10년간 쓴 노트가 30권에 달한다”고 어필했다. 신중하고 온화한 인품 덕분에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런 그에 대해선 ‘인품은 훌륭하지만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이 따라다닌다. 정치인으로서 분명한 주장을 하는 대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어중간한 답만 내놓는다는 것이다. 점잖은 언사(言辭)도 장점이자 단점으로 꼽힌다. 그가 지방 강연에 가면 객석 태반은 졸고 있다는 증언이 많다. ‘나가타초(일본 국회의사당이 있는 곳)에서 제일 재미없는 남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그가 자민당에서 유서 깊은 보수 본류 ‘고치카이(宏池会)’의 적통자라는 점은 앞으로 한일 관계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가 이끄는 ‘기시다파’의 뿌리는 고치카이에 있다. 고치카이는 전통적으로 한국·중국과 같은 주변국과의 외교, 아시아·태평양 안의 일본을 중시한다. 그런 만큼 고치카이가 배출한 총리들은 한일 관계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처음 논의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당사자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태평양 전쟁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주장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 총리 등이 대표적이다. 위안부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의 고노 요헤이 당시 관방장관 역시 고치카이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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