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100년 전 '姓女'의 전성시대

2021. 9. 2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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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이름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를 말한다. 이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우리나라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름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호칭'을 갖고 살아간 여성들이 태반이었다. 그 시절 '성녀', '아기'(阿只)'라는 여자 이름을 만나러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1910년 9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정성녀(鄭姓女)라는 여성의 기사가 보인다. "모 학교 학생 정성녀는 본래 화류계 자질이 있어 연전(年前; 여러 해 전)부터 밤낮으로 잠통(潛通; 몰래 간통함)하여 지금 회임(懷妊; 아이를 뱀) 9달인데, 그 두 명의 정부(情夫)는 각기 자기 아이로 인정하고 (중략) 그 여자는 학도 신분으로 이 같은 추한 소문이 낭자한 즉, 학계에 일대 흠점(欠點)이라고 비평이 있는데, 그 중 한 남자는 조모(曹某)라고 하더라."

1920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성녀(李姓女)의 범죄 내용이 실려있다. "수원군 동탄면 금곡리 130번지 이성녀는 금년 7월 30일 동탄면 금곡리 이구상(李龜相)에게 '참외 도둑년'이라고 발길로 채인 것을 분하게 여겨 원수를 갚을 작정으로 이구상의 부친 이봉상의 소유인 글방 집에 불을 놓았음으로 방회죄로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더라."

1920년 9월 1일자 동아일보에는 '기독교의 희생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여기에는 박성녀(朴姓女)가 나온다. "경상북도 영주군 문정리에 사는 권성화(權聖華)의 아내 박성녀(44)는 본시 효성이 극진하던 터인데, 불행히 작년에 그 시어머니의 상사(喪事; 초상)를 당한 후 조석 (朝夕) 상식(上食)을 지성으로 받들던 중, 요사이에 와서 그 남편 권성화가 어찌하여 예수교를 믿게 된 이후로는 도무지 조석 상식을 지내지 못하게 함에 박성녀는, 남편의 불효한 죄는 마땅히 이 몸이 목숨으로써 대속(代贖; 대신 속죄함)하리라 하며, 지난 27일 밤 9시경 그 시모(媤母; 시어머니)의 신주가 있는 뒷동산 정결한 곳에 매안(埋安;신주를 무덤 앞에 묻음)을 하고는, 자기는 그 부근 냇물에 가서 몸을 던져 죽어버렸다더라."

여자들의 이름이 모두 '성녀'다. 한자까지 똑같은 '성녀'다. 이 '성녀'라는 이름은 계속해서 신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여성 이름들에서 왜 '성녀'가 많았을까.

1910년 한일합병이 이뤄지자 일제는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장려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정보 수집을 쉽게 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인들의 이름을 명확하게 만들어 놓아야 행정상 감시·통제가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일본식 이름을 가지는 것은 금지했다. 1940년대 창씨개명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조선인은 일본식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당시에는 일반 백성 중 대다수 여자들은 이름이 없었다. 교회나 관청에 갔을 때 이름을 물어보면 "이름이 없다"고 답했다. "그럼 성(姓)은 무엇이냐"고 묻고는 김씨면 김씨 성(姓)을 가진 여자라 하여 김성녀(金姓女), 최씨 성을 가졌으면 최(崔)씨 성을 가진 여자라 하여 최성녀(崔姓女)라 지어 주었다 한다. 그래서 김성녀, 최성녀, 박성녀, 강성녀(姜姓女), 주성녀(朱姓女) 등등이 나왔다. 따로 이름이 없었던 보통의 여자들은 이렇게 모두 '성녀'가 되었다.

성녀 말고도 이런 식으로 지어진 이름이 몇 개 더 있었다. 집에서 그냥 "애기야"라고 불렀다고 해서 지은 '아기'라는 이름, "예삐"라고 불렀다고 해서 지은 '업비'라는 이름, '간난이'를 한자로 표기한 '간란'(看蘭)이란 이름 등이다.

1921년 3월 21일자 매일신보에는 "시내 종로 5정목 146번지 임아기(林阿只)란 여자는 시내 연지동 101번지 이영근(李永根)에 대하여 이혼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 민사부에 제기하였었는데..."라는 기사가 보인다. 같은 해 9월 28일 매일신보에도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 청리동 주문학(朱文學·25)과 그 처 정아기(鄭阿只·21)는 동네에서 주막 영업을 하고 지내오던 중..."이란 기사가 보인다. 여성들의 이름이 모두 '아기'다.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이혼 여성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나혜석(1896-1948)도 어렸을 때 이름이 없었다. 나혜석도 어린 시절 그냥 '애기'라고 불렸다. 부친 나기정은 딸·아들 가리지 않고 모두 신교육을 시켰지만 유독 딸들에겐 이름 짓기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나기정은 개명한 관료였지만 봉건적 인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1913년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할 즈음에야 비로소 '혜석'이라는 항렬을 따른 이름을 얻었다. 18살 때였다.

김옥균의 정치적 동조자로서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공헌했지만 공개처형됐던 궁녀 고대수(顧大嫂) 역시 이름이 없었다. 고대수는 별명이었다. 몸이 남자처럼 건장하고 힘이 세어 남자 대여섯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어서 수호지 속 여장부 고대수로 불렸을 뿐이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이 남기니 자신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라는 뜻이겠다. 반면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은 행로난(行路難)이란 시에서 "차낙생전일배주, 하수신후천재명(且樂生前一杯酒, 何須身後千載名)"이라고 노래했다. "살아있을 때 술이나 한잔 즐겨야지, 어찌 천년 뒤에 남을 이름을 생각하겠는가"라면서 쓸데없이 이름 남기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이름을 갖고 싶어도 못 가진 여성들이 무수히 많았다. 지금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詩)가 얘기하듯이 이름은 '주체적 인간'의 출발점이다. 이름에는 자신의 가치가 담겨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이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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