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명품거리에 들어선 거대한 '케이크 조각'의 정체는?
한국 첫 작품 송은문화재단 신사옥 개관
‘와!’ 탄성은 찰나였다. ‘빛의 구멍’은 순식간에 시선을 빨아올렸다.
지하 2층 전시실 중앙부 천장에 거대한 나선형 얼개의 ‘홀’이 뻥 뚫렸다. 그 아래 바닥에서 거의 누운 자세로 멍하게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만큼 홀의 스펙터클에 눈과 마음이 끌렸다. 구멍 위쪽은 전면이 투명 유리창으로 덮인 1층 로비 공간. 여기 들어온 햇살이 로비 천장의 조명등 빛과 함께 은은하게 내려앉는다. 복합 조명을 받는 지하 공간에선 대자연의 설산 앞에서 실제 화폭을 펼쳐놓고 설원을 옮겨 그리는 작가의 모습이 영상 스크린에 걸려 잔잔히 흘러갔다.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 박물관, 중국 베이징올림픽 주경기장 등 프로젝트로 명성을 떨쳐 세계 건축계 거장으로 꼽히는 스위스 출신의 2인조 건축가 자크 헤어초크와 피에르 드 뫼롱이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 신작은, 낭만적 감성과 합리적 분석이 아름답게 어울린 복합문화공간이다. 지난 28일 낮 공개된 서울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 인근 도산대로 변 송은문화재단의 신사옥이다. 지상 11층, 지하 5층의 건물 내외부를 답사하며 두 설계자의 거장성을 실감했다. 지하실 천장에 뚫은 빛의 구멍은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비인간성을 중화시켰다. 시적 정서가 흐르는, 나뭇등걸 같은 건물 외벽의 표면과 인간 친화적인 건물 옆 출입문 뒤켠의 작은 정원, 담벽에 걸친 수목의 넝쿨 등은 대중에게 열린, ‘개방적 얼개’를 표상했다.
건물은 각지게 자른 케이크 조각 모양의 외형을 지녔다. 57m 높이의 대형 건물인데도 직사각형 정면 벽체에 창문이 두개밖에 없다. 게다가 뒤쪽은 급경사로 각을 주면서 깎아 옆에서 보면 직각삼각형 모양의 단면을 지녔다. 다소 차가운 정면에 비해 깎아낸 뒤쪽은 행인과 입주자들을 위한 인간 친화적인 공간이 몰려 있다. 1층에 공용공간 성격의 정원이 있고, 꼭대기부터 차곡차곡 테라스 등 구조물이 이어진다. 건축물의 높이·면적에 대한 규제와 재료와 공간 입면을 3디(D) 모형으로 분석하면서 치밀하게 어림한 결과물이다.
청담동 명품거리는 화려해 보여도 냉혹하고 고립적이다. 어두운 빛깔의 노출콘크리트에 괴량감만 앞세운 강퍅한 상업용 건물이 뒤켠에 있고, 개성과 과시욕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힘든 각양각색의 건물이 맥락 없이 이어진다. 이를 두고 헤어초크와 드 뫼롱은 2018년 건물 착공 당시 간담회에서 “주변에서 영감을 줄 만한 건물이 없었다”는 혹평을 내놨다.
이 공간에 작지만 소담한 자연 정원과 산책로를 틔워주고 1층 내외부를 공용공간으로 개방한 것은, 자본에 포획된 공간에 인간과 자연의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건축가의 간절한 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숨은 소나무’(송은)란 의미를 살렸다는 건축가의 설명이 마냥 다가오진 않지만, 콘크리트 본체에 목제 거푸집으로 본을 떠서 오래된 고가구 표면처럼 나뭇결의 질감을 살린 전면 벽체 표면에선 재료에 몰입하면서도 기능성에서 미감과 작가의식을 추출하는 특유의 방법론이 도드라지게 드러났다.
사옥 낙성 기념으로 지하 2층과 지상 2층에 차려진 개관전도 인상적이다. 헤어초크와 드 뫼롱이 20년 넘게 자신들 작품을 기록해온 토마스 루프 같은 유명 아티스트들과 같이 한 사진 작품들이 모형과 함께 나와 눈맛을 돋웠다. 송은문화재단 기획전 등에서 상을 받거나 전시한 박준범·정지현 등 작가들이 3~4년의 설계·건축기간을 함께 지켜보며 작업한 커미션 작품들을 보는 재미도 있다. 특히 건축사진가 정지현씨가 지난 2년여 동안 찍은 사진들은 단순 기록사진이 아니라 앵글로 지반 굴착 과정과 평탄화 작업을 포착하는 순간의 긴장감을 담았다. 콘크리트가 가루였다가 액상이 되고 다시 단단한 고체로 변해 건축물을 구조체 구실을 하게 하는 과정을 포착했다. 암반에 박힌 강철 파일을 용접으로 제거하는 장면은 박진감이 넘친다.
청담동 상가거리에 열린 문화공간을 표방한 이 건물의 전시장과 로비 공간, 정원 등에서 앞으로 펼쳐질 교류와 행위의 가능성이 주목된다. 건축가들이 애초 꿈꿨던 대로 문화적 허브로서 작품들과 사람들의 소통과 교류를 어떻게 이을 것인지 기대감을 낳게 한다. 고층부 뒤켠 전망 테라스가 사적인 사무 공간으로만 쓰인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일부라도 개방되어 청담동 일대 전체 풍경을 조망하는 장소가 된다면, 건물의 가치가 더욱 빛날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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