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이 된 신혼여행기

한겨레 2021. 9. 2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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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들 귀농서신]정말 해변에서 한참 떨어지고, 유명 관광지에서 꽤나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간다니요!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 도자기나 헝겊을 대하는 태도. 무엇 하나로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아내는 결혼을 앞두고 꿈꿨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혼여행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어요. 여행 경비 계좌를 따로 만들어서 3년 동안 돈을 모으기도 했고, 어머니 아버지 은퇴여행기를 보며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했죠. 그런데 ‘코로나'로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때에 생경한 곳으로 떠난다는 게 부담이 많이 되기도 했고, 질서정연한 국내 상황에 비해서 유럽은 혼란의 연속 같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국내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아끼게 된 비행기값으로 반려견 뀨와 함께, 차를 빌려 다니기로 했죠. 그렇게 전북 완주를 거쳐 제주에 다녀왔어요.

사람이 없는 한적한(사실은 참 좋아서 혼자만 알고 싶은)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견학'이 되더군요. 조용한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고, 나중에 귀농하게 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녔습니다. 한창 귀농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면서 떠오른 화두 중 하나가 ‘6차 산업’이었죠. 달콤해야 할 신혼여행은 그렇게 잔소리 가득한 6차 산업 수학여행이 되었습니다. 1차로 농사, 2차로 가공, 3차로 농촌체험 등 관광 사업까지. 1+2+3 해서 6차 산업이라고요. 본받을 만한 많은 곳들을 둘러보고 왔습니다.

완주에서 묵은 곳은 에어비앤비를 통해 정했습니다. 강아지와 함께 갈 수 있는 숙소를 골라 가다 보니 선택안이 많지 않았죠. 조용한 마을에 있는 농가의 별채였습니다. 깔끔하고 널찍하지만, 우리 괴산집 별채만 못한 곳이었죠. 그런데도 평소 예약이 꽉 차 있는 곳이니 서둘러 예약하라며 에어비앤비가 강력 추천했던 곳이에요. 들어가는 날에는 비가 엄청 쏟아졌습니다. 처마 가까이 차를 댔더니, 다음날 일찍 농장에 나가셔야 한다는 사장님이 짐 옮기고 나서는 차를 좀 빼달라 부탁하시며 찹쌀막걸리를 한병 건네시더군요.

다음날 아침 볕이 좋다 싶어 산책을 나와 보니 일찍이 마당에 고추를 이만큼 깔아놓고 말리고 있었어요. 나가는 길에 우리 강아지가 흐트러뜨리지 못하도록 목줄을 짧게 잡고 돌아다니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풀어놓아도 된다며 편하게 다니라 하셨습니다. 뀨는 강아지답게 여기저기 한참 돌아다녔죠. 볕에 말리는 고추 냄새도 처음으로 맡아보고, 마당에 묶인 개와 잠깐 교류도 하며 즐거워 보였습니다. 기회가 오면 다시 묵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이게 어머니에게 듣던 6차 산업이구나 했습니다.

제주에서는 성산읍의 중산간에서 묵었어요. 큰 마당에 딸린 여러 크기의 별채 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습니다. 어둠이 깔리면 상향등을 켜지 않고서는 운전이 어려운 곳. 차창 앞으로 제비들이 휙휙 지나가는 바람에 천천히 다녀야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예약할 때는 이렇게 산 깊은 곳인 줄 몰랐어요. 이런 데에 사람들이 찾아올까 싶었는데, 장박을 하면서 지켜보니 사람들이 끊임없이 왔습니다. 어떻게들 알고 그렇게 찾아오는지! 일찍이 귀농해서 제주에 터 잡았다는 사장님 내외가 부러웠습니다. 사장님은 가장 바깥쪽의 큰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내외분이 작은 농장을 하시면서 펜션도 운영하신다 해요. 오전에는 농장 돌아보고, 손님들이 얼추 밖으로 나갈 시간이면 돌아와 정원 가꾸고 펜션 정리 하신다고요. 이렇게 자리를 잘 잡아놓으면 대대손손 걱정이 없겠다 싶었죠.

제주도의 조그맣고 다양한 가게들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름난 관광지도 아닌 정말 조그마한 ‘시골'에 자리를 잡은 소품점들은 생계 걱정이 절로 들 정도였죠. 한 소품점은 헝겊때기만 팔더군요. 컵받침, 행주, 수세미, 냄비받침, 손수건 같은 것들이었어요. 값나가는 물건들도 아닌데 그렇게 정성스레 모셔놓으니 참 보기 좋았습니다. 이런 걸 많이들 사갈까 싶었는데 그렇게 장사가 된다네요. 인스타 유명 소품점인데 온라인 매장도 오프라인 매장만큼 예쁘다네요. 한 곳은 도자기만 팔고 있었어요. 평소에 관심이 없던 분야인지라 시큰둥했는데 들어가서 구경하니 이것저것 갖고 싶어졌습니다. 하고 싶은 걸 잘해낼 수 있어서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가 되면 시골이 문제가 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제주도라는 훌륭한 장소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해변에서 한참 떨어지고, 유명 관광지에서 꽤나 거리가 있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기를 쓰고 찾아간다니요!

강아지를 대하는 태도, 도자기나 헝겊을 대하는 태도. 무엇 하나로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가 되면 더 이상 장소의 문제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귀농을 결정한 마당에, 이제는 작게나마 농사를 짓더라도 어떻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이 찾아올 만한 농가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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