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쓴 '당구천재' 해커, "저도 벗고 싶어요"

김창금 2021. 9. 2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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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회 휩쓴 재야 고수 겸 당구 인기 유튜버
프로당구 투어 초청서 쿠드롱 꺾고 4강 이변
유튜버, 선수, 일반인 3중 '페르소나' 겪어
"삶은 치열하게" 정신으로 당구 전파 뿌듯
프로당구 투어 대회에 출전한 해커. PBA 제공

“나도 벗고 싶다.”

프로당구 피비에이(PBA) 투어의 인기 스타로 뜬 ‘가면 쓴’ 해커(39·선수 등록명)는 가면 벗은 얼굴을 지면에 공개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28일 서울 양재역 근처 ‘당구해커’ 클럽에서 만난 그는 “나도 답답하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캐릭터다. 벗으면 내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해킹그룹 어나니머스를 상징하는 가면을 쓴 그는 3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재야의 고수, 7만5천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생활인의 모습 3가지가 가면을 쓴 그의 페르소나(가장된 인격)다.

지난주 열린 2021~2022 피비에이 투어 티에스(TS)챔피언십에서 초청선수로 출전해 4강까지 올라선 것은 아마추어 강자로서의 면모였다. 세계 최강의 프레데릭 쿠드롱을 32강에서 만나 이기면서 출범 3시즌째인 피비에이 역사에 일대 사건을 만들었다.

감회도 벅차다. 그는 “쿠드롱 형하고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부담없이 치고자 했다. 정말 내 인생 경기였다”고 돌아봤다. 1세트 14점 고지에서 1점을 추가하지 못하고 주춤했을 때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그는 “쿠드롱 형이 9점까지 추격해왔다. 마치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쫓아오는 듯했다”며 순간을 회고했다.

티에스챔피언십을 최종 3위로 마치면서 받은 상금은 1천만원. 동호인 대결 등 아마추어 대회를 30회 안팎 정복한 그한테도 큰 상금이다. 시즌 첫 대회 출전 때 일부에서 제기된 가면 착용 논란도 실력으로 해소했다. 감정 변화를 노출시키지 않는 이점이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경기 중에는 상대 얼굴 볼 시간이 없다. 나도 쿠드롱 형이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경기 뒤 리플레이를 보고 알았다”고 반박했다.

수만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브 인플루언서의 역할도 중요하다. “당구를 재미있게 대중적으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2016년 기획하고, 2018년 닻을 올린 그의 유튜브 ‘당구해커’는 3년째 지속되고 있다. 일주일에 5~6회, 회당 6~7시간의 라이브 방송의 긴장도는 크다. 당구장 창고의 6.6㎡(2평) 공간에서 내기당구 중계로 시작했지만, 우직하게 달려온 현재 제작 편수만 1천개가 넘는다.

여자프로나 유명 선수 초청 대결, 저점자·고점자 팬 대항전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면서 팬과 교감하는 후원 문화를 창출했다. 그는 “보통 대회를 하면 최소 1주에서 최대 한달이 걸린다. 그런 대회를 20회 정도 운영해 왔다”고 말했다.

해커. PBA 제공

초보자들의 유입을 위해 3구 대회뿐 아니라 4구 대회를 구상하는 것도 젊은 층으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4구 실력으로 150이 되면 마지막 장벽이었던 3쿠션에 대한 도전 의욕이 생겨난다. 단계가 높아지면 그때는 승패가 아니라 ‘내가 공을 컨트롤한다’라는 자기 만족이나 자기와의 싸움이 주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당구 열정이 팬들한테도 전달된 것일까. 그는 “방송 중 구독자들이 선물이나 후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준다”고 설명했다. 또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만 방송하지 않는다. 보조 진행자 둘을 포함해 실시간 방송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해커가 프로 무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는 쉽지 않다. 그는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왔다. 마찬가지로 전업 선수로 뛰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해야 한다. 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유튜브를 더 잘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해커가 가면을 벗는 경우는 유튜브 방송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올 때다. 그는 “가면을 벗으면 시원하다”고 했다. 하지만 가면을 벗는 순간 더 이상 해커가 아니다. 그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도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다. 그는 “당구를 위해서 ‘해커 캐릭터’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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