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기의 '배우'다] "연기는 깔 게 없다"는 쾌남 이병헌
편집자주
※ 여러분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이병헌에게 영화 ‘지상만가’(1997)는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도, 평단의 지지를 얻지도 못했다. 딱히 두드러지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배우가 되고 싶은 청년 종만을 연기했다. 종만에게 현실은 술집종업원이지만 미래는 할리우드 스타다.
‘지상만가’가 개봉했을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게 할리우드는 지구 밖 장소였다. 할리우드 스타가 방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때였으니 그들은 마치 외계인과도 같았다. 영화는 종만의 꿈을 할리우드 스타로 설정하며 그의 허황된 바람과 더불어 비루한 현실을 강조한다. 흥미롭게도 당시 스크린 밖 이병헌 역시 할리우드 진출을 꿈꿨다고 한다. 주변 냉소에도 불구하고 영어 개인 교습을 받는 등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했다고 한다. 꿈은 이뤄졌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으로 할리우드로 나아갔고, 세계가 주목하는 배우가 됐다.
이병헌의 성공기는 누구나 잘 안다. 아시아 한류 스타를 넘어 세계로까지 뻗어나갔다.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고 성장이 멈춰버린 여느 동료 배우들과는 달랐다. 그는 2016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고, 지난 7월 열린 칸영화제 폐막식에선 최우수여자배우상 시상에 나섰다. 한국 밖 그의 위상을 가늠할 만한 일들이다.
초창기엔 연기보다 외모가 눈길을 사로잡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대가가 돼 있었다.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으면 ‘인간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할 것처럼 냉정해 보였고(‘악마를 보았다’와 ‘남산의 부장들’로 확인할 수 있다), 김을 앞니에 붙이고 히죽거리거나(광해, 왕이 된 남자) “모히토에서 몰디브 한 잔”을 말할 때(내부자들)는 정감 있었다. 왕이든, 대신이든, 깡패든, 독립운동가든, 퇴물 복서든, 기러기 아빠든 그는 물고기가 물속을 유영하듯 다종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냈다. 그의 출연작이 나올 때마다 유행어처럼 따라붙는 댓글이 있다. ‘이 형(이병헌) 연기는 깔(비판할) 게 없다’는 식의 글이다. 1991년 KBS1 드라마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로 데뷔한 지 딱 30년. 이병헌처럼 그토록 오랜 시간 정상에 있으면서 하나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은 배우는 매우 드물다.
이병헌이 눈에 들어온 건 1992년 첫 전파를 탄 KBS2 드라마 ‘내일은 사랑’이었다. 대학생들의 풋풋한 일상을 그린 이 드라마에서 이병헌은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난히 하얀 이를 환히 드러낼 때 청춘은 빛을 발했다. 우수 가득한 눈도, 중저음의 목소리도 매력 있지만, 이병헌의 가장 큰 자산은 쾌청한 미소라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위해 그를 몇 차례 만났다. 2009년 첫 만남이 아직도 강렬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했다. 답변 사이사이 폭약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함께했던 1시간 가량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가 자리를 뜬 다음에 떠오른 단어가 있었다. 쾌남.
이병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을 목도한 적도 있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2012년 런던한국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됐을 때의 일이다. 이병헌은 영국 런던 근교에서 ‘레드: 더 레전드’를 촬영하고 있었다. 함께 출연 중이던 유명 배우 브루스 윌리스와 헬렌 미렌, 존 말코비치가 개막식 레드 카펫을 밟고 ‘광해, 왕이 된 남자’를 관람했다. 세 사람은 영화 상영 뒤 파티에까지 참석해 개막작 주인공 이병헌을 축하했다. 이병헌은 짧은 시간 명배우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이병헌은 잠깐 얼굴(!)을 비춘다. 웃음기는 없고, 냉정과 비정이 어린 얼굴이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월드 스타인 그를 보고 반가워했을 세계 팬들이 적지 않을 듯하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오징어 게임’의 체급은 미들급 정도에서 라이트헤비급 정도로 올라간다. ‘오징어 게임’이 “넷플릭스가 현재까지 선보인 모든 작품 중 가장 큰(성공한) 작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 겸 최고 콘텐츠 책임자)는 말이 나온다. ‘오징어 게임’ 성공에 있어 이병헌의 공헌도는 적어도 2할은 된다고 생각한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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