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용]총리의 소시지와 눈물 젖은 빵

박용 경제부장 입력 2021. 9. 29. 03:03 수정 2021. 9. 2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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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자동차 대기업이 소시지를 만들어 구내식당에 공급한다면 골목상권 침해니 일감 몰아주기니 해서 혼쭐이 난다.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은 자동차 생산량보다 더 많은 연간 약 700만 개의 '커리부어스트' 소시지를 만들어 6곳의 공장 구내식당에 제공하고 공장 밖 슈퍼에서도 판매한다.

독일 노동자에게 국민음식 소시지는 영양 만점 점심 메뉴였다.

독일에서 9월 총선을 앞두고 이 '폭스바겐 소시지'가 논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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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 거창한 구호보다 서민 삶 먼저
선거철에도 할 말 한 독일 전 총리 소신
박용 경제부장
한국에선 자동차 대기업이 소시지를 만들어 구내식당에 공급한다면 골목상권 침해니 일감 몰아주기니 해서 혼쭐이 난다. 독일에선 얘기가 다르다. 독일 자동차회사 폭스바겐은 자동차 생산량보다 더 많은 연간 약 700만 개의 ‘커리부어스트’ 소시지를 만들어 6곳의 공장 구내식당에 제공하고 공장 밖 슈퍼에서도 판매한다. 이 회사가 1973년 볼프스부르크 공장에서 소시지 생산을 시작한 건 공장 직원들 때문이다. 독일 노동자에게 국민음식 소시지는 영양 만점 점심 메뉴였다.

독일에서 9월 총선을 앞두고 이 ‘폭스바겐 소시지’가 논란이 됐다. 탄소중립 경영을 선포한 폭스바겐이 직원들의 채식 수요와 환경 보호를 이유로 소시지 생산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소시지 재료인 소와 돼지를 기르고 도축하는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많다는 것인데, 이 소시지를 즐기던 노동자와 서민들에겐 날벼락 같은 결정이었다.

과거 폭스바겐 이사회에 참여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77)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입장문을 내고 “커리부어스트는 생산라인에서 밤낮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에너지 바와도 같은 것이니 그대로 두는 게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 등의 담론이 휩쓸고 있는 선거 국면에서 원로 정치인의 소신 발언은 독일사회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슈뢰더 전 총리의 부인인 김소연 독일 NRW글로벌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대표의 인스타그램엔 볼프스부르크, 뮌헨,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하노버 등 독일 전역에서 “총리님께 안부를!” “총리님을 위하여 건배” 등의 인사말과 함께 커리부어스트를 먹는 인증샷이 속속 올라왔다.

김 대표는 최근 페이스북에 이번 논란을 전하며 괴테의 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떠올렸다. 슈뢰더 전 총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야간학교를 다니고 대학 때는 공사장에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비를 마련하던 고학 청년이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그에게 커리부어스트는 공사판의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열량보충제였을 것”이라며 “막일을 직접 뛰어본 사람만이 근육을 뻐근하게 소진시키는 노동 후의 소시지 한 조각과 차가운 맥주 한 잔이 주는 의미를 알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남편은) 환경 보호와 동물 애호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마음을 대신 읽어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안 슈뢰더 전 총리는 2000년대 초 실업과 저성장에 시달리며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 경제의 체질을 바꾼 개혁 리더였다. 사회민주당(사민당) 소속의 그는 최대 지지 기반인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동시장 유연성을 높이고 방만한 복지 지출을 줄이는 한편 일자리 창출과 실업자의 취업을 장려하는 ‘하르츠 개혁’을 밀어붙일 정도로 강골이었다. 노조 등에 밉보인 그는 권력을 잃었지만, 독일은 ‘유럽의 리더’로 복귀할 수 있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환경 보호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선거철마다 정치권이나 금융시장에서 엘리트들이 탄소중립, 탈원전 등 멋진 신세계의 비전을 쏟아낸다. 하지만 서민에게 비용을 전가하고 충분한 설득과 공감 없이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는 설익은 비전과 어설픈 개혁 과제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슈뢰더 전 총리가 ‘폭스바겐 소시지’ 논란에 그토록 발끈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박용 경제부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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