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고통 호소가 협박이 된 사회

정희진 여성학자 2021. 9. 2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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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 사회에서 2019년 말부터 발생한 코로나19는 2020년 1월3일부터 사망자 집계가 시작되었다. 9월25일 현재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그간 코로나 누적 사망자는 2434명이다. 한편, 지난 23일 대한신경과학회는 4년 동안 자살한 이들이 하루 38명으로 총 5만2950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통계청 결과도 비슷하다. 지난해 하루 평균 자살한 환자 수는 37.8명. 작년에만 1만3797명(37.8명×365일)이 자살로 사망했다는 얘기다

정희진 여성학자

1년간 1만3000여건의 자살과 코로나 이후 1년10개월 동안 2400여명의 사망자. 기간 차이가 두 배에 가까운데도, 자살이 코로나 사망보다 약 5.6배 많다. 이조차 정확한 통계는 아니다. 자살 관련 보고는 실제와 큰 차이가 있다. 은폐되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심장마비, 실족사, 폭행 치사 등으로 보고되거나 유자녀에게 “엄마가 미국 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우울과 자살 관련 책을 보면, 인간이 계량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인식론적 충격에 빠질 것이다. 나는 실제 자살 건수는 최소 두 배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알려진 대로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와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는 자살률 1위국이다. 2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 증가 속도도 1위다. 탈북민의 자살률은 10%에 이른다. 열 명 중 한 명이 자살한다는 얘기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이들이 생명, 생계, 진로, 일상을 빼앗겼지만, 우울증 같은 정신과 계통의 질병사인 자살도 유전되고 전염성이 있다. 코로나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나는 ‘자살 생존자’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시도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다. 그 자체가 질병의 증상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살한 이들로 인해 고통을 받은 고인의 주변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철학이 없다
그것은 사회 수용력의 문제다
타인을 대신해 아플 수는 없어도
누군가 아픔을 터놓고 말하면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타인을 수용할 수 있다

이 표현은 잔인하다. 암처럼 다른 질병으로 인한 사망의 경우는 간병의 어려움과 사별의 슬픔 등 아무리 남은 자의 아픔이 있더라도,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사망 당사자의 고통을 우선시한다. 또한 ‘암 생존자’는 암을 극복한 사람을 의미하지, 환자 주변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예전에 비하면 자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변했다. 낙인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자살 생존자’는 여전히 자살한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 얼마나 인색한지를 보여준다.

이런 말이 나오는 문화, 즉 자살에 이르는 고통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자살률이 높은지도 모른다. 우울증 환자는 자기 질병보다 주변 사람들의 오해와 투쟁하는 데 더 많은 기력을 쏟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인간이 가진 자원의 전부인, 인간관계를 잃는다. 자신의 고통에 무지하고 적대적인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당연히 낮다. 지구가 네모라면 그 끄트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인과 마찬가지로 자살은 투병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픈 것이다. 살아갈 의지, 기운, 기분에 문제가 생겼는데, 어떻게 의지로 극복하라는 말인가. 계속 암을 예로 들어 암환자인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지만, 암 세포가 몸 전체에 전이된 이에게 “마음을 강하게 먹고” 암을 없애라는 말과 같다. 정신과 계통의 질병에 도움을 주어 해피 메이커라고 불리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은 통념과 달리 뇌가 아니라 장(腸)에서 생산, 분비된다. 그러므로 정신건강을 위해서는 장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된다. 이처럼 신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을 상호적이다.

우리말에는 “죽겠다”는 표현이 많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더워 죽겠다”…. 여기서 ‘죽겠다’는 부사, 형용사처럼 강조의 표현이다. “이렇게 사느니 죽고 싶다” “살기 싫다”는 말도 삶이 고되다는 한탄으로 여겨져서 흔히 오고가는 말이다.

그런데 “자살하고 싶다”고 호소하면, 그때부터 듣는 사람은 당황한다. 이때는 놀라거나 의심하지 말고 “힘드시겠네요, 혹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없을까요?” 이 정도로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몇 초의 감동노동이 그렇게 엄두가 안 나는 일일까. 아무리 마음에 없는 말이라도, 비난이나 의지 강조보다는 낫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다. “네가 우울증이면 나는 말기 암이다” “나는 더 힘들어” “우울증이라며 어떻게 직장에 다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지금 나한테 협박하니?”….

나 역시 타인의 호소에 이런 식으로 응답한 적이 많다. 다만 조금 조심하는 편이다. 질병뿐만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믿어주는 (척이라도 하는) 표정을 가질 수 있는 삶의 긴장이 필요하다.

“자살 협박” 표현은 ‘흥미롭다’. 우리는 살면서 타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호소가 있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는 자영업자,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 관계나 직장 생활에서의 갈등, 만연한 성폭력, 파산…. 인생이 고해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사건과 그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이다.

그런데 왜 타인이 “죽고 싶다”고 말하면 그토록 부담스러워할까. 자기 부담까지 투사하여 “협박”이라고 말할까.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참을 수 없는 육체적 통증과 소진, 무의미, 비참함으로 삶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때 누구나 “죽고 싶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특히 우울증에 대해서만은 극단적 선택, 단호한 의지처럼 인식하고 “그 힘으로 살라”는 황당한 조언을 한다.

지혜로운 치료자들은 협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간단한 해석을 내린다. “협박은 기본적으로 거래입니다. 네가 뭔가를 주지 않으면, 나는 너에게 이렇게 (나쁘게) 하겠다가 협박이죠. 그러나 죽고 싶다는 호소는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요구가 있다면 들어주고, 이해해달라는 정도일 것이다. 이것이 협박인가. 이는 고통 호소를 협박이라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고통에 대한 철학이 없다.

듣는 이가 더 놀라서 “나한테 앓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얘기 무서워” “나한테 왜 이래” 같은 반응은, 청자 역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수용력 수준을 반영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파트너, 동료, 가족, 친구 등 어떤 관계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노력이다. 친밀성과 안전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상대방을 수용하는 첫 단계는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울증 환자가 많다. 대개 아침이 가장 힘들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지구를 들어 올리는 일 같다는 이들이다.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서 나오는 데 몇 시간이 걸리거나 못 나온다. 나는 죽고 싶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찬성이야! 얼마든지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뒷일은 나한테 다 맡겨, 대신 조건이 있어. 내일이어야 해”. 죽어도 좋은데, 하루만 미루라는 얘기다. 그리고 내일은 또 내일… 또 내일…. 그렇게 삶을 연기(延期)하면 된다. 어차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우리는 타인을 대신해 아플 수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지만, 들어줄 수는 있다. 특별히 ‘용한 멘트’도 필요 없다. 충분히 들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어려운 처지의 이들의 호소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할까.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일 수도 있고, 나한테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는 듣기 싫다, 알고 싶지 않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아우성이 넘친다. 주변에서 해결이 가능하다면, 간단한 절차로 공권력이 정의의 편에 서 준다면, 가능성은 적지만 얄미운 가해자 혹은 정말 저질 가해자가 벼락을 맞는다면…. 청와대에 호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피해자들도, 투병하는 이들도 인생이란 ‘돌이킬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불평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안다. 특히 이 시대, 마상(마음의 상처)이 없는 이는 없다. 그걸 한번이라도 터놓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자해는 말하지 못하는 몸속의 말을 밖으로 흘러 보내는 행위일 수도 있다. 말은 몸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양한 말이 들려야 한다. 이는 공중보건의 문제다. 혐오, ‘관종’의 자기도취, 페이크 뉴스는 마구 들린다. 반면 필요한 논쟁이나 고통의 호소는 결단을 해야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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