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혁기의 책상물림]대머리와 까마귀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2021. 9. 29.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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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다들 나를 대머리라고 부른다. 많지도 않은 나이에 벌써 정수리가 휑한데 굳이 가리려 하지 않고, 술 한 잔 걸쳤다 하면 모자를 벗어 젖히고 민머리를 드러내곤 한다. 이를 본 사람마다 대머리, 대머리, 그러기에 아예 나의 호를 대머리라는 뜻의 동두(童頭)라고 지었다. 사람들이 나의 모습 그대로 불러주는 것이니 나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옛사람에게 호(號)는 매우 중요했다. 성인이 되면 명(名)은 일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주로 자(字)로 불리곤 했는데 이는 친지 어른이 일방적으로 지어주는 것이어서 본인의 의사를 반영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호는 스스로 지을 수도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담고 지향하는 가치를 표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대머리를 호로 삼은 이유를 묻는 이에게 김진양은 해명을 이어간다.

“‘대머리는 걸식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으니 부귀의 징조가 아니겠는가? 대머리는 노화의 현상인데 이렇게 건장하니 장수의 징조가 아니겠는가? 하하하! 하나 부귀는 애초에 내가 바라는 게 아니고, 그저 내 한 몸 쉴 초가집과 굶주리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 있으니 이렇게 살며 나에게 주어진 천명을 다하면 그만이다. 남들이 대머리라 불러주고 나도 스스로 대머리라 부르니, 나의 대머리가 나는 참 좋다네.”

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글로 남긴 이는 권근인데, 그의 호는 소오자(小烏子) 즉 까마귀 새끼라는 뜻이다. 얼굴이 하도 까무잡잡해서 사람들이 까마귀 같다고 하자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호로 삼은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남의 놀림에 상처받지 않고 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고 말들은 곧잘 하지만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관건은, 타고난 겉모습과 달리 내면은 스스로 기르기에 달린 것임을 아는 데에 있다. 김진양은 실력과 신망을 겸비하여 앞날이 창창한 인물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위세를 떨칠 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매우 겸손하고 부귀에 초연한 삶의 모습에서 권근은 그가 길러온 내면의 깊이를 보았다. 이들의 이야기가 해학과 여유를 넘어 진정한 자존감으로 읽히는 이유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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