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천재 김수경의 삶 통해 일본에 '이산가족' 알리고 싶었죠"

강성만 2021. 9. 28.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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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일본 도시샤대 이타가키 류타 교수

김수경 평전을 쓴 이타가키 류타 교수. ‘위안부’ 문제 전문 사이트 ‘파이트 포 저스티스’ 제공

<북으로 간 언어학자-김수경 1918~2000>(인문서원).

인류학자인 이타가키 류타(49) 일본 도시샤대 사회학부 교수가 지난 7월 일본에서 출간한 언어학자 고 김수경(1918~2000) 선생 평전이다.

일제 때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도쿄제대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김수경은 ‘조선의 언어 천재’로 불렸다. 강원도 통천 출신인 그가 해방 때까지 습득한 외국어는 그리스어, 라틴어, 산스크리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덴마크어,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까지 15개나 된다. “김수경이 김일성대 재직 때 프랑스어 원서를 놓고 직독직해하며 수업한 게 지금도 그 대학의 전설적인 강의이죠. 모두 7개 언어를 바로 원서를 보며 가르칠 수 있었다고 해요. 경성제대에서 김수경을 가르친 일본인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해방 뒤 일본인 제자들에게 ‘경성제대에 김수경이란 언어 천재가 있었다. 너희들은 왜 그만큼 하지 못하냐’고 독려했었죠.”

지난 24일 ‘줌’으로 만난 이타가키 교수의 말이다. 그는 한국 마당극에 흥미를 느끼며 도쿄대 4학년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유창한 한국말로 인터뷰에 응했다.

<북으로 간 언어학자> 표지.
1942년께 도쿄에서 찍은 김수경. 딸 김혜영씨 제공

국내 번역 출간(푸른역사 출판사)도 예정된 이 평전은 김수경의 삶과 언어학자로서의 성취를 함께 다뤘다. “어떤 젊은 연구자가 책을 보고 너무 눈물을 흘려 코피가 났다고 해요. 책을 읽고 울었다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아요. <한글의 탄생> 저자 노마 히데키 교수도 에스앤에스에서 ‘대단한 책’이라고 칭찬했죠.”

해방 뒤 서울대 상대 전신인 경성경제전문학교 교수로 있던 김수경은 1946년 8월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그해 9월 문을 연 김일성대 창설 요원으로 일해달라는 북의 초청에 응한 것이다. 김일성대 조선어학과 교수 김수경은 이듬해 김두봉 김일성대 총장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만들어 북한 정권 초기 언어정책의 기틀을 만들었다. 같은 한자는 같은 형태로 표기한다는 ‘형태주의’ 원칙을 세워 ‘두음법칙’을 폐기하고 한자를 철폐하는 등의 북한 ‘언어 혁명’에 깊숙이 관여했다.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 전공생들이 1938년 졸업 송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뒷줄 맨 오른쪽이 김수경, 뒷줄 왼쪽에서 둘째가 봉강 정해룡의 아우 정해진이다. 딸 김혜영씨 제공
1942년 도쿄제대 도서관 앞에서 김수경(왼쪽)과 이희승(오른쪽)이 사진을 찍었다. “어머니의 이화여전 은사인 이희승 선생님께서 안식년을 도쿄대에서 보내 두 분이 자주 만나신 듯합니다.”(김혜영) 딸 김혜영씨 제공

한국전쟁 이후 분단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김수경과 그 가족의 고통도 책의 한 축이다. 전쟁이 나고 김일성대 교원들로 구성된 단기 선무공작대 일원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던 김수경이 북으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아내와 2남2녀 자녀들과 길이 엇갈린 것이다. 가장과 떨어져 남녘 땅에 묶인 자녀 넷 중 셋과 아내(고 이남재)는 김수경을 찾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으로 1970년대에 캐나다 이민을 갔다. 고인이 된 맏딸 혜자씨는 국외에서 부친 소식을 알아보겠다며 일부러 외국 진출이 쉬운 간호학을 전공해 가족 이민을 이끌었고, 1948년 평양에서 태어난 둘째딸 혜영씨는 부친 소식을 한 조각이라도 더 얻으려고 토론토대학에서 뒤늦게 언어학을 공부했다. 캐나다 비자를 얻지 못한 차남(태성)은 대신 독일에서 이 나라 어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대에서 30년 가까이 독일어를 가르쳤다.

캐나다의 가족들은 토론토를 찾은 옌볜대 교수 도움으로 1986년부터 김수경과 편지 교환을 했고 1988년에는 드디어 혜영씨가 베이징대학에서 열린 조선학 학술대회에서 부친과 극적으로 만났다. 이화여전 문과 출신으로 이희승 교수의 애제자였던 아내도 남편이 별세하기 2년 전인 1998년에 평양에서 상봉해 ‘반세기 이별의 한’을 풀었다.

도쿄대 학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던 이타가키 교수는 4학년이던 1994년에 우연히 한국의 마당극 대본집을 읽고 한국 연구를 결심했단다. 모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21개월 동안 경북 상주에 머물며 이 지역 사회가 일제 강점기 때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연구했다.

경북 상주의 식민지 체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타가키 교수는 자신이 김수경 평전을 쓴 데는 우연이 작용했다고 밝혔다. “박사 논문을 집필하던 2002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 총리가 북한을 다녀오고 일본 사회에 북한을 악마화하는 흐름이 생겼어요. 많은 지식인들도 이런 공격에 체제 순응적으로 가세했죠. 옛 식민주의자처럼 북한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죠. 이를 보면서 다른 방식으로 북한을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어요.”

‘북으로 간 언어학자-김수경’ 평전 펴내
경성제대 시절 15개 언어 통달 유명
1946년 김일성대 창설 요원으로 ‘월북’
남쪽 가족들 캐나다 이민해 ‘상봉’ 성공

2013년 일본에서 첫 ‘김수경 학술대회’
북 지역 연구 대신 8년 걸려 평전 집필

김수경(왼쪽)과 이남재(오른쪽)는 1943년 경성 부민관에서 결혼했다. 딸 김혜영씨 제공
한국전쟁 때 헤어져 48년 만인 1998년 평양에서 상봉한 김수경과 이남재 부부. “1986년 초 아버님의 첫 편지를 받은 지 12년 만이자 별세 2년 전인 1998년에야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어머님이 평양을 방문하셨지요. 아버님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이 전과 같지는 않았지만 옛 기억은 생생하여 두 분이 옛 얘기를 나누셨나 봅니다.”(김혜영) 딸 김혜영씨 제공

남들과는 다른 북한 연구의 한 주제로 ‘함흥의 1945년 전후 지역사’ 등을 떠올렸던 그는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방문학자로 있던 2010년 3월 토론토에서 우연히 혜영씨를 만나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해 들었다. “토론토에 월남한 이북 출신 한인들과 일제 시대 북한 지역 선교 자료가 많아 들렀다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김 선생을 만났어요. 그날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수경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잊고 있다가 2년 뒤 도시샤대 연구모임 뒤풀이에서 같은 대학 동료인 언어학자 고영진 교수가 김수경 선생 이야기를 하더군요. 북한 언어정책의 기초를 세운 분이라고요.”

그와 고 교수는 2013년에 한·중·일 학자를 불러 도시샤 대학에서 언어학자 김수경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혜영·태성씨도 참가해 ‘아버지 김수경’이란 글을 발표했다.

그는 평전 완성에 2013년부터 꼬박 8년이 걸렸다고 했다. 왜 평전을 썼는지 물었다. “처음엔 북한 지역사를 연구하려고 했는데 현장 연구가 쉽지 않았어요. 자료는 많이 모았지만 중심축이 없어 많이 헤맸어요. 그러다 김수경이란 존재를 알고는 인물 중심으로 20세기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수경 중심으로 넓은 세계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죠. 이 분의 삶에는 냉전 그리고 소쉬르 구조주의 언어학, 이산가족, 북한 정치가 다 들어있어요.”

언어학자로서 김수경의 가장 큰 업적은? “북한 조선어학을 개척한 분이죠. 연구자들이 연구해야 할 부분을 직접 만들었다는 게 가장 중요하죠. 언어를 열 몇 개나 알아 서구 언어학 책을 다 원서로 읽었고, 경성제대에서 독일 철학자 헤겔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썼어요. 서구의 학문 전통을 제대로 배운 분이죠. 학문이 뭔지 그리고 그 학문 내의 언어학, 언어학 내의 조선어학이 뭔지 제대로 알고 이런 전제 아래 조선어학을 만들었어요. 다른 언어학자들은 어려운 일이었죠.”

책에서 혹시 새로 밝힌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북한은 48년부터 1월 15일을 한글날(훈민정음기념일)로 기념합니다. 그런데 47년 10월 9일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한글날 논의에 대한 김수경의 글이 실렸더군요. 김수경은 이 논문에서 10월 9일은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 해례본 출판기념일에 불과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날은 실록에 나온 1443년 12월(음력)이 맞는다고 주장합니다. 북한의 한글날 변경에 김수경이 깊이 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이죠. 이미 정착한 관행이라도 과학적인 검토를 통해 바꿀 수 있으면 바꾼다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치우친 당시 북한 사회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라 더욱 흥미로웠죠.” 그는 김수경의 논문을 읽으며 많은 재미를 느꼈다면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김수경은 조선어학의 기초부터 만든 사람이라 스스로 그 학문의 전제를 만들어야 했죠. 그의 개척자적 논문에는 직접 말을 하진 않아도 행간에서 소쉬르 구조주의 언어학과 마르크시즘을 읽을 수 있어요. 글도 매우 논리적이죠.”

그는 평전을 쓴 데는 “정치지도자와 군대로만 표상된 북한에 언어 천재이자 이산가족인 김수경과 같은 사람도 있음을 일본인들에게 알려주려는 뜻도 있다”고 밝혔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은 타자일 수 없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아요. 예컨대 이산가족은 일본인들에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일본인들이 평전을 보고 북한 사람들과 이산가족의 진짜 마음을 읽어내길 바랍니다.”

계획을 묻자 그는 “북한의 미술, 건축 등 문화사를 공동연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북한의 학술간행물 등을 전자화한 ‘코리아문헌테이터베이스’(KBDB)도 구축해 공개했다.

인터뷰 끝에 한국의 마당극에 흥미를 느낀 이유를 물었다. “대학 학부 때 도쿄 서점의 연극코너에서 <녹두꽃>이라는 한국 마당극 대본집을 봤어요. 당시 일본에는 대극장 중심 연극에 대항하는 ‘소극장 운동’이 있었어요. 연극에 관심이 있었던 저도 그 운동에 공감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극장 바깥 ‘마당’에서 정치 참여적인 연극, 그것도 관중들을 웃기면서 하는 민중극을 하는 데 놀라 흥미를 느꼈죠. 그렇게 처음에는 연극론으로 한국에 관심을 갖다가, 나중에는 민중극에 나오는 ‘민족’ 개념이 일본과 전혀 다른 어감으로 쓰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본에서 민족은 우파가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번역된 책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 등의 영향을 받아 ‘한국 내셔널리즘과 마당극’이라는 졸업논문을 썼어요. 박정희 시대 가면극의 무형문화재화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전통 재생과 김지하, 임진택 등에 의한 탈춤의 비판적 정신 계승이라는 ‘아래’로부터의 전통 재생을 논의하고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쓰인 마당극에 나타난 민주·민중·민족 이미지를 분석한 글이었죠. 부끄러운 글이라 출간은 하지 않았어요.”

김수경(맨 왼쪽)의 둘째딸 혜영(가운데)씨가 1988년 평양을 찾아 전쟁 뒤 북에서 태어난 동생 김혜옥(당시 김일성대 학생·맨 오른쪽)씨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혜옥이는 안타깝게 2015년에 고인이 되었지요.”(김혜영) 딸 김혜영씨 제공

김수경 차녀 혜영씨는 한국에서 교대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남편과 함께 캐나다에 이민을 갔다. 가정 형편으로 박사 학위를 따지는 못 했지만, 토론토대 박사 과정에서 조선시대 몽골어 회화책 <몽어노걸대>에 나오는 우리말과 몽골어 비교 연구를 했고, 토론토대 학부 2학년 때부터 65살에 은퇴할 때까지 이 대학 동양학과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버님은 젊은 나이에 우리말 연구에 뜻을 두고 넓고 깊은 공부를 위해 많은 언어를 습득하시며 학자로서 준비를 하셨죠. 전도 양양한 학자였으나 일생을 통틀어 보면 마음껏 뜻을 펴지 못한 불운의 학자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자로서 더 많은 업적을 쌓으실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요.”

부모에게 물려받은 좋은 점 하나를 꼽아달라고 하자 혜영씨는 ‘성실’을 이야기했다. “저희 4남매가 아버님의 좋은 점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아버님은 시간을 아끼고, 매사에 ‘성실히’ 임하신 걸 엿볼 수 있어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일하는 자세를 가지셨지요. 아버님께서 1987년 중국에 사는 제자한테 보내신 편지에도 ‘저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로쇠하여 가고 있으나 조국의 통일과 나라의 과학 발전에 다소나마 이바지하기 위해 노마에 째찍질하는 심정으로 꾸준히 일해 나가려 하고 있습니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미사여구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어머님과 저희는 알고 있었지요. 저희 4남매는 아버님과 어머님(역시 성실함의 극치를 보이셨던 분)을 본보기로 삼고 노력했지만, 두 분은 저희가 다다르지 못하고 우러르기만 한 별과 같은 존재이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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