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의 세상의 저녁] 전두환 제거 역쿠데타 계획

한겨레 2021. 9. 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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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의 세상의 저녁]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이 위컴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위컴은 거부했다. 위컴의 거부에는 군령 체계 위반과 안보 공백을 초래한 군사행동을 미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확인시켜줄 필요성과 함께,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표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 장성이 역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갖고 미국 쪽에 접근한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정찬의 세상의 저녁] 정찬ㅣ소설가

지난 9월16일 외교부는 미국 카터 대통령 기록관으로부터 전달받은 5·18민주화운동 관련 비밀해제 문서 사본들을 공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끈 것은 전두환 세력에 대한 군부 내 역쿠데타 움직임에 관한 문서로, 1980년 2월1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 본부에 “이범준 장군으로부터 12·12 쿠데타를 되돌리려는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으며, 위컴 주한미군사령관도 군부 내 추가적 소요의 조짐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2·12 쿠데타는 1979년 12월12일 전두환의 사조직 ‘하나회’ 세력이 대통령의 승인 없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자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군부 권력을 장악한 반란 행위였다. 이 사건이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당혹과 분노를 동시에 불러일으킨 가장 큰 이유는 안보의 공황 상태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 서울로 끌어들인 병력은 서부전선 방어의 핵심인 전방 9사단 1개 연대와 제2기갑여단, 30사단 1개 연대였다. 더욱이 이 부대들은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의 작전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병력이었다.

용산 미8군 지하 벙커에서 쿠데타 상황과 배후세력을 파악한 노재현 국방장관은 한국군 1군단의 수도기계화사단과 26사단에 서울 시내 진입 준비를 명령했으나, 내전을 우려한 위컴의 강력한 만류로 물러섰다. 그사이 전두환 그룹은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무력화시키는 한편 자신들에게 필요한 병력을 서울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쿠데타군의 병력 출동을 막지 못한 상황에서 진압군 출동을 막았던 위컴의 조치가 전두환의 반란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었다.

반란을 성공시킨 전두환이 위컴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위컴은 거부했다. 위컴의 거부에는 군령 체계 위반과 안보 공백을 초래한 군사행동을 미국 정부가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를 확인시켜줄 필요성과 함께, 전두환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표현되어 있었다. 더 나아가 위컴은 한국군 당국에 전두환과 노태우 등 전방병력 무단이탈에 책임 있는 장성들의 군법회의 회부를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군 장성이 역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갖고 미국 쪽에 접근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글라이스틴 회고록과 위컴 회고록에서 내용이 다른 부분들이 노정되지만, 상황의 전체적 흐름은 거의 일치한다. 한국군 장성이 제공한 정보 가운데 민감한 내용은 전두환의 당초 계획은 군권 장악 후 민간 정부를 탈취하는 것이었으나 미국의 완강한 태도로 계획을 잠시 미루고 있다는 정보, 비육사 출신 장교 90%와 육사 출신 장교 50%가 전두환을 반대한다는 정보, 30여명의 장성급 장교들이 전두환 제거를 계획한다는 정보였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역쿠데타에 대한 ‘도덕적 거부감’이 조금도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중요한 한계가 따랐다. 우선 쿠데타 주역들의 정체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한다고는 했으나 또 다른 전두환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정보가 없었다. 더욱이 역쿠데타 동원 병력이 얼마나 되며, 유혈사태 없이 전두환 세력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12·12 반란과 같은 안보의 혼란을 다시 겪는 일이었다.

워싱턴은 역쿠데타 쪽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전두환에게도 그 사실을 알린 뒤 향후 민간 정부를 넘보는 일을 기도한다면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역쿠데타 사건’을 매듭지었다. 워싱턴이 이런 조치를 취하기까지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의 역할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전두환과 친밀한 관계인 그는 글라이스틴과 위컴에게 군 통치권자가 되어버린 전두환을 제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미국에 없음을 지적하고, 워싱턴은 한국의 민주주의보다 안보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상기시켰다고 했다.

12·12 쿠데타는 시기적으로도 운이 좋았다. 쿠데타 2주 뒤인 12월26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데탕트가 완전히 사라져버림으로써 워싱턴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대통령선거를 앞둔 카터 민주당 정부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역쿠데타 사건’ 후 신군부가 15명의 고위 장성을 제거한 것에 대해 위컴은 회고록에서 “역쿠데타 계획 정보를 갖고 찾아왔던 장성은 제거 대상에 없어 계획의 실체는 비밀로 남겨졌다”고 언급했다. 이 언급은 그 장성이 전두환 측의 위장 인물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전두환이 역쿠데타 계획이라는 위장극을 연출하여 미국의 본심을 알아내려고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컴이 전두환을 만난 것은 12·12 반란 두달이 지난 1980년 2월 중순이었다. 한국의 군부 실세와 관계 단절이 계속될 경우 한-미 안보체제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었다. 이 만남에서 전두환은 “자신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앞으로 행동을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위컴의 회고록은 전한다. 그 만남 뒤 위컴은 상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전두환은 자신의 운명이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지식이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이 국제사회에 미치게 될 중요성에 대한 지식은 걸음마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발견했다”고 썼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말이 ‘운명’이다.

1979년 10월26일 밤 궁정동의 총성은 전두환에게 운명의 전주곡이었다. 보안사령관인 그는 암살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제외하고 박정희의 죽음을 제일 먼저 알았다. 돌발 사태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이 보안사였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의 ‘정치적 아버지’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박정희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가슴 깊이 품었다면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심정과 흡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궁정동의 총성이 쿠데타의 일환이라면 쿠데타 세력과 맞설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한 전두환은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에게 병력을 태릉 육군사관학교로 긴급 출동시킬 것을 요청한 데 이어, 부마민주항쟁으로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에게 원대복귀를 요청했다. 그는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의 지시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암살범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때였다. ‘하나회’ 멤버들이 실전부대 사단장으로 포진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12·12쿠데타에 이어 이듬해 5·17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지닌 무력을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력의 대상이 광주 시민 전체가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자 분단된 한국 현대사의 운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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