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이 '문단 밖으로!'를 외친 까닭은?
문단의 평가 시스템이 구성원 사이의 친소 관계로 굴절·왜곡되어 있다는 주장은 문단을 향해 던져지는 가장 심각한 비판에 해당한다. 등단 절차와 문예지의 원고 청탁, 각종 지원과 문학상 심사 등 문학의 생산과 유통 과정 전반에는 불가피하게 평가와 취사선택이 수반된다. 독자에게 양질의 작품을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게이트키핑인 셈인데, 그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냐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항상 내 소설을 가지고 문단의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학상 수상이 작가를 문단 안에 묶어 놓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장편소설 <남한산성>이 제15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2007년 11월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작가는 문단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지론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밝히곤 했다. 도대체 ‘문단’이란 게 무엇이관데 김훈은 이토록 문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던 것일까.
문단이란 문학 창작 및 유통과 관련된 이들의 느슨한 집합체를 가리킨다. ‘문학계’라는 말과 비슷하다. 영어로는 ‘literary circle’ 또는 ‘literary world’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시나 소설 등을 창작하는 이들과 그 작품을 평가하는 평론가, 문학 단행본과 문학 전문지를 내는 출판사 발행인과 편집자, 문학 담당 기자 등이 그 구성원이다. ‘문단’의 하위 범주로는 ‘시단’ ‘작단’ ‘평단’ 등이 있다.
김훈은 오랫동안 신문기자로 일했고 특히 문학 담당 기자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가 신춘문예나 잡지 신인상 같은 별도의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문예지에 소설을 연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문학 기자로서 확보한 명성과 평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소설가가 된 뒤에도 그의 행로는 순탄했다. 빼어난 문학 기자였던 김훈은 일급의 작가로 성공적으로 변신했다. 김훈은 기자로서나 작가로서나 문단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은 셈이었다. 그런 그가 ‘문단 밖으로!’라는 구호를 외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문단을 다룬 책 가운데 선구적이며 고전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김병익의 <한국문단사>를 꼽을 수 있다. 이 책의 1973년 초판 서문에서 김병익은 ‘문단사’를 ‘문학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와 작품이 항상 문단사에서도 사건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문단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된 작가와 창작에서 문학사적 평가를 높이 두어야 할 경우를” 자주 발견한다고 그는 덧붙여 설명한다. 김병익은 ‘사건적인 성격’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는 그것을 ‘당대 문단의 평가’로 비틀어서 이해해 보고자 한다. 김훈이 경계한 문단의 폐해가 그것과 관련되거니와, 문단의 폐쇄적·자족적 성격 그리고 순혈주의와 자기복제의 함정을 김훈은 겨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춘문예나 잡지 신인상은 물론 다수의 ‘권위 있는’ 문학상 역시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짜인 한국 문단 구조에서 장편소설로 작가로서의 출발을 알렸고 그 뒤로도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하는 김훈의 존재는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시 부문 수상자인 남진우는 김훈과는 상반되는 취지로 수상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내 시는 결코 대중적인 시는 아니지만, 한국 시단에서 내가 맡아야 할 일정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그 길로 계속 나아가겠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는데, 이런 태도는 소설과 시의 장르적 차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력 문예지의 편집위원이자 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서 남진우가 당시 문단의 핵심 중 핵심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반면 오랫동안 영화 쪽 일을 하다가 장편 <고래>로 등단했으며 등단 뒤에도 주로 장편을 써 온 천명관의 태도는 역시 김훈과 비슷하다. 2015년 문예지 <악스트>가 마련한 소설가 정용준과의 대담에서 그는 작가들이 “선생님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한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시작해 등단을 할 때, 원고 청탁을 받을 때, 문학상 후보에 올라 심사를 받을 때, 지원금을 받을 때 등등 “문단 생활을 한다는 건 내내 선생님들의 평가와 심사를 받는다는 의미”라며 그렇게 ‘선생님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작가들의 상상력과 취향이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다 비슷하다”고 일갈한다.
문단의 평가 시스템이 구성원 사이의 친소 관계로 굴절·왜곡되어 있다는 주장은 문단을 향해 던져지는 가장 심각한 비판에 해당한다. 등단 절차와 문예지의 원고 청탁, 각종 지원과 문학상 심사 등 문학의 생산과 유통 과정 전반에는 불가피하게 평가와 취사선택이 수반된다. 독자에게 양질의 작품을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게이트키핑인 셈인데, 그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냐 하는 의문이 항상 따라붙는다. 문단이 일종의 폐쇄적 성채를 이루어 외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잘 팔리는 작가와 작품에 문학성이라는 후광을 씌워서 포장하는 ‘주례사비평’의 폐해 역시 문단의 문제점으로 단골로 소환되곤 한다. 2015년 표절 논란 때 새삼 불거진 문학권력 또는 문단권력 주장은 이런 의구심의 단적인 표출이었다.
문단을 일종의 ‘이너 서클’로 파악해서 그 안에서 모종의 비밀스러운 음모와 협잡이 이루어지곤 한다는 식의 주장도 드물지 않게 나온다. 이진우의 장편소설 <적들의 사회>(1994)는 그런 음모론의 극단을 보여준다. 유력 문예지를 발행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출판사 주간과 그가 운영하는 ‘공동창작팀’, 그 출판사의 책들을 기사로 띄워 주는 거대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 ‘권력’에 등을 돌렸다가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죽음으로 내몰린 작가, 각각 소설가와 평론가로 등단하고자 문단 권력자들에게 성 상납을 하거나 범죄 행위에 가담하는 기자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은 자극적이고 과장되어 있기는 해도 권력으로서 문단의 속성을 알게 한다.
문단의 이런 부정적 면모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영국 작가 조지 기싱의 소설 <뉴 그럽 스트리트>(1891)는 19세기 후반 영국 문단을 배경으로 작가와 평론가, 잡지 주간 등 그 구성원들의 이전투구를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인 출세 지향적 비평가 재스퍼 밀베인은 예술을 일러 ‘사업’이라 단언하며 인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런 인맥과 사업 수완으로 유력 문예지의 편집장 자리를 꿰찬 그는 친구의 소설을 과도하게 칭찬하는 평을 쓰고는 이렇게 변명한다. “작가한테 출판업과 관련된 친구들이 있다면, 그 친구들은 최선을 다해 작가를 도울 의무가 있어. 좀 과장되거나 심지어 거짓말을 한들 무슨 상관이야?” 소설 속에는 서로의 작품을 추어올리는 서평을 주고받거나, 반대로 경쟁자를 헐뜯고 몰락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등 문단의 추악한 민낯을 보여주는 삽화들이 줄을 잇는다. 그것이 비단 19세기 영국 문단의 상황만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21세기 현재 한국 문단의 실정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짐작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리라.
얼마 전 영국 신문 <가디언>에는 2018년에 작고한 미국 작가 필립 로스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실렸다. 최근 출간된 <우리가 몰랐던 필립 로스―섹스, 인종, 자서전>(The Philip Roth We Don’t Know: Sex, Race, and Autobiography)이라는 책에서 자크 벌리너블라우 조지타운대 교수는 미국 의회도서관에 보관된 필립 로스의 서한들을 분석한 결과를 제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로스가 문학상 수상과 대학교수직 등을 위해 출판계 및 문단 동료들과 서로를 추켜세우는 평론과 추천서를 주고받았으며 심지어는 그가 수상한 유력 문학상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이의 부탁을 받고 그를 특정 자리에 추천하는 편지를 써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로스는 <유령 작가>와 <미국의 목가> <휴먼 스테인> 등 무려 9개 소설에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설가 네이선 주커먼을 등장시킨 바 있는데, 벌리너블라우는 “그토록 많은 소설에서 자신과 똑 닮은 작가에 관해 쓰면서도 로스가 그런 식의 문학상 ‘사냥’에 대해서는 묘사한 적이 없다”며 실망감과 충격을 표했다.
로스는 노벨상을 제외한다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생전에 받았고 로비가 아니었더라도 수상 이력에 큰 차이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벌리너블라우의 책이 폭로하는 사실은 아닌 게 아니라 충격적이다. 집필실에 틀어박힌 채 수도자처럼 글을 쓸 뿐 세속의 평가에는 무관심한 고결한 작가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스 역시 인간이었고, 문단이라는 것도 빛과 그늘을 아울러 거느린 세속 인간들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는 사례라 하면 어떨까.
최재봉ㅣ책지성팀 선임기자.
1988년에 한겨레에 들어와 1992년부터 30년째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작가들과 독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하며, 문학의 본질과 변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한다. 지은 책으로 <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 <거울 나라의 작가들> <그 작가, 그 공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에드거 스노 자서전> <악평> <제목은 뭐로 하지?> 등이 있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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