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부, '규제 샌드박스' 넷 중 하나는 묵살..기업은 속탄다

나현준,우수민 2021. 9. 28. 17: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허은아 국회의원실 자료 입수
ICT 분야서 23% 승인 못받아
기존 사업자 반발에 지지부진
정부도 적극 행정않고 미온적
도수안경 온라인판매 막히자
해외 본사두고 꼼수영업 기승
시장은 해외업체에 잠식당해
원격 투약도 약사반발로 무산
승인 늦어지자 사업 존폐 기로
더브이엑스가 운영할 예정인 소형 영화관 AWC. [사진 제공 = 더브이엑스]
1~4인석 규모의 소형 영화관 운영을 사업모델로 하는 스타트업 '더브이엑스'는 첫 개점을 눈앞에 두고 최근 사업 자체가 존폐 기로에 놓였다. 지난 2월부터 추진해 온 규제 샌드박스 논의가 소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미온적 태도로 지지부진해지면서다. 현행법상 개봉 영화 상영관은 30석 이상 좌석을 갖추거나 바닥 면적이 60㎡를 넘어야 한다. 문체부 관계자는 "일부 민간 심의위원들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비디오방과 큰 외형적 차이가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스크린쿼터 준수에 대한 의구심이 있고 코로나19 때문에 효과적인 실증도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회사 측은 오히려 모르는 사람과 앉아 영화를 관람하기 꺼려지는 시기에 꼭 필요한 서비스라고 항변한다. 배형준 더브이엑스 대표는 "기존 멀티플렉스는 해외 기술에 의존해 작은 상영관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만, 저희는 자체 디지털 시네마 플랫폼(DCP) 서버 개발로 이를 가능하게 했다"며 "필름 시대의 낡은 규제를 가지고 대책 없이 논의를 미루는 사이 스타트업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8일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이 같은 규제 샌드박스 미승인 건수는 2019년 제도 도입 이후 38건에 달한다. 규제 샌드박스란 기존 규제에 의해 막힌 사업에 대해 여러 조건을 달고 2년간 임시 허가를 내주는 사업이다. 정부는 그간 차세대 모빌리티, 가상현실(VR) 모바일 통신 분야에서 124건을 허용해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승인 건수가 38건으로 총 신청 건수의 23%에 달했다. 이 중 6개월 이상 지연된 과제는 21건이나 된다. 과기정통부는 "소관 부처 반대, 이해관계자와 갈등, 사회적 합의 필요 등의 이유로 승인이 지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규제 장벽으로 애꿎은 스타트업만 피해를 보고 있다. 대표적 예가 스타트업 '딥아이'다. 2019년 현행법상 금지돼 있는 도수 안경의 온라인 판매를 위한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를 신청했지만 안경사협회의 반발로 아직까지 규제 샌드박스가 승인되지 못하고 있다. 딥아이는 극단으로 치닫는 갈등을 무마해 보고자 기획재정부 '한걸음 모델'에 들어가 상생 협력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사이 해외에 본사를 두고 해외직구 형식으로 안경을 판매하는 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겼다.

이미 시장은 잠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김세민 딥아이 대표는 "한국어로 된 웹사이트에서 버젓이 판매를 하는데도 본사 주소가 해외라는 이유로 아무런 규제나 감독을 받고 있지 않는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국내 규제가 풀리지 않는 사이 국내 스타트업은 역차별을 받고, 해외직구 비용이 더 추가되면서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비용도 늘어나는 악순환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자 소송전까지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쓰리알코리아에서 개발한 원격 화상 투약기다. 약국이 문을 닫은 야간이나 공휴일에 화상으로 약사의 복약 상담을 받아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다. 쓰리알코리아에 따르면 과기정통부가 회사 측에 먼저 제출 서류 양식까지 제공하면서 규제 샌드박스 신청을 독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약사협회의 반발에 부닥친 이후 3년 가까이 실증특례 도입 결정이 지연되고 있다. 사전검토위원회에서 판매의약품 품목 수와 기계 설치 대수를 비롯한 세부 항목까지 확정한 상황에서 본심의위원회 상정만 미뤄지고 있어 손해가 막심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쓰리알코리아는 지난달 희망고문을 멈추고 빠른 결정을 내려 달라는 취지로 과기정통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제기했다.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는 "팬데믹 이후 위생이 철저해지면서 병원을 덜 가는 탓에 약국의 수익성이 악화하는 상황에서 화상 투약기는 일반의약품 시장을 활성화하고 건강보험료 재정도 절감할 수 있다"며 "그럼에도 정말 안전성 검증이 필요하다면 본래 규제 샌드박스 취지대로 일단 실증부터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나 중국에선 이미 화상 투약기가 상용화되고 있는데 국내에서 이렇게 규제를 막으면 향후 해외 사업자가 시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당국이 규제를 완화하겠다며 도입한 규제 샌드박스마저 문턱이 높아지면서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허 의원은 "소관 부처 반대, 이해관계자와 갈등으로 규제 샌드박스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의 목적과 취지를 고려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저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극적인 자세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ICT 규제 샌드박스 주무 부처인 과기정통부도 이 같은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분야별로 이해관계자들이 있기 때문에 한쪽 편만 들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입장 차이를 조율해 나가면서 상생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전성민 가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행 규제 샌드박스 모델은 노사정위원회 개념과 유사하지만 신산업을 일으킬 때마다 정치적 의사결정이 늦어지는 만큼 소비자의 사회적 선택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꿔가야 한다"고 짚었다.

[나현준 기자 / 우수민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