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만나는 드보르작, 성녀 루드밀라, 성 바츨라프
체코를 대표하는 음악가라면 단연 안토닌 드보르작(1841-1904)이다. 올해 체코는 그의 탄생 180주년을 기념한다. 그는 1841년 9월 8일에 프라하 근교의 작은 마을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났다. ‘흙수저 출신’이었던 그는 체코 출신 작곡가로는 처음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다.
그가 살던 시대의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공용어는 독일어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체코 음악의 다양한 가능성을 꽃피우고 그것을 세계의 음악으로 승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의 작품 중에 1885년에서 1886년에 작곡한 오라토리오 <성녀 루드밀라>가 있다. 드보르작은 영국의 리즈 시(市)로부터 1886년 리즈 음악제를 위하여 합창곡을 작곡해 달라는 위촉을 받고 이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9세기에 기독교화 되어가는 체코 민족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연주시간은 2시간이 넘는다.
그러면 성녀 루드밀라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체코의 수호성인 성 바츨라프의 할머니이다. 헝가리의 최대 국경일이 8월 20일 ‘성 이슈트반의 날’이라면 체코의 최대 국경일은 9월 28일 ‘성 바츨라프의 날’이다. 체코에서는 이 날을 마치 건국일처럼 기념한다. 바츨라프는 보헤미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보헤미아 공국의 군주로 서기 907년에 태어나 929년 9월 28일에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보헤미아(Bohemia)라는 지명의 기원은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켈트 족의 일파인 보이(Boii) 족이 살았는데 기원전 2세기 후반에 팽창하는 로마에 밀려 알프스 산맥 너머로 쫓겨났다. 이들이 새로 정착한 지역을 로마인들은 ‘보이족의 땅’이라고 하여 ‘보이오하이뭄(Boiohaemum)’이라고 불렀다. ‘보헤미아’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기원후 6~7세기에 보헤미아에는 슬라브 족의 한 갈래인 체코 민족이 자리 잡게 된다. 9세기에 들어 그리스의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는 슬라브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이 두 형제 성인은 현재 러시아, 불가리아, 세르비아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인 키릴 문자도 전파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바츨라프의 할머니 루드밀라는 바로 이 두 성인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바츨라프는 할머니 루드밀라에 의해 기독교식으로 교육받으면서 자랐고 921년에 아버지가 죽자 14세의 나이에 권력을 물려받았다.
그는 독일교회의 도움으로 보헤미아를 기독교화 하는데 힘썼지만 그의 어머니와 동생은 외세와 기독교를 반대하고 이교도 신앙을 고수했으며 반대파 귀족들과 손잡았다.
어머니는 루드밀라를 정적으로 여기고는 그녀를 살해하도록 했다. 이에 바츨라프는 어머니를 귀양보냈고 925년에 할머니를 성녀로 시성했다.
그후 동생은 바츨라프를 암살했다. 권력을 잡은 동생은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고는 조그만 경당을 세워 바츨라프의 유골을 안장했다. 그후 바츨라프는 시성되어 체코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그에 대한 전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국난이 닥쳤을 때 동굴에서 잠자던 보헤미아의 기사들을 깨워 적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했다고 한다. 체코 정부는 2000년에 그가 순교한 9월 28일을 국경일, 즉 ‘체코 민족의 나라가 탄생한 날’로 선포했다.
프라하에는 바츨라프의 이름을 딴 큰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은 14세기에 처음 조성되었고 처음에는 ‘말 시장’이라고 불렸다. 17세기부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체코 사람들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에 눈을 뜨게 된다. 민족주의 운동에 고무된 이들이 1848년부터 이곳을 바츨라프 광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이 광장은 1890년에서 1930년 사이에 국립박물관을 비롯, 호텔 에브로파와 같은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번화가로 변모했으며 아울러 광장 이름에 걸맞게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도 이곳에 세워졌다. 전투적인 기사 모습을 한 그의 기마상 아래에는 성녀 루드밀라를 포함 네 명의 보헤미아 성자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 성 바츨라프의 석관이 안치된 성 비투스 대성당 안에는 알폰스 무하(1860-1939)가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길을 끄는데 가운데 창문의 윗부분은 성 키릴과 성 메토디우스가 슬라브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 장면이고 중간 부분은 어린 바츨라프와 할머니 루드밀라가 기도하는 장면이다.
한편 드보르작은 나중에 오라토리오 <성녀 루드밀라>를 무대 공연용으로 개작하여 ‘교회 오페라’라는 부제를 붙여 120년 전인 1901년 10월 30일 프라하 국립극장에서 초연했다. 프라하 국립극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지배 하에서 공용어인 독일어가 아닌 체코어로 된 오페라와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 민족의식에 불타던 체코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오페라·연극 및 발레의 전당으로 체코국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상징한다.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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