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800쪽..4권 분량의 '묵직한 사유', 권당 5만원 안팎..대박 땐 '묵직한 수익'

나윤석 기자 2021. 9. 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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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책의 세계

출판계에 ‘숏폼’ 자리잡았지만

1㎏ 넘는 ‘벽돌’ 콘텐츠 꾸준해

다면적 진실·깊은 사유 과정은

분량이 긴 책에만 담을 수 있어

2014년 출간된 ‘21세기 자본’

경쟁사 없어 700만원에 판권

11만부 팔려 출판사 기둥으로

“합숙 없이는 만들 수 없는 책” “최소 4만~5만 원의 정가. 잘되면 회사 매출의 빛과 소금.”

이연실·정진아 문학동네 차장이 최근 유튜브 채널 ‘랭킹 동네-벽돌책으로 회사를 세웠다’ 편에서 주고받은 ‘벽돌책’에 대한 얘기다. 두 사람은 ‘은근히 잘 팔린 벽돌책 톱(Top) 5’를 소개하며 “하루 매출만 500만 원에 이르는 ‘베스트셀러 벽돌책’은 회사의 구원자”라고 말했다. 그 덕분에 얇고 가벼운 ‘숏폼’이 출판계 트렌드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도 1㎏이 넘는 벽돌 콘텐츠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전 세계의 연대기’ ‘제국의 정전 셰익스피어’ ‘지금 다시 계몽’ 등 이달에 출간된 벽돌책만 여러 권이다. 딱 떨어지는 ‘기준’은 없으나 출판계에선 750~800쪽을 벽돌책의 ‘하한선’으로 삼는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위압감에도 과감히 책을 집어 드는 독자층은 누구이며, 벽돌책이 시장에서 갖는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작가들이 말하는 매력까지 ‘벽돌책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떠돌이 아이템’ ‘역자 포기’ 수두룩…“벽돌책 대박에 1000만 원 회식” 전설도

최근 미국 퓰리처상 수상작 ‘이전 세계의 연대기’를 펴낸 글항아리는 ‘벽돌책 명가’로 유명하다. ‘일본 제국 패망사’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 ‘21세기 자본’ 등 내로라하는 히트작을 냈다. 보통 벽돌책은 300쪽 내외 단행본보다 번역 기간과 제작비가 세 배 이상 든다. 1쇄는 다른 책과 유사하게 1500~2000부 정도 찍는데, 3000부만 팔려도 ‘선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벽돌책 중에선 난해한 내용과 고된 번역 작업 등으로 여러 출판사를 오가는 ‘떠돌이 아이템’이 많다고 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내년 출간 예정인 ‘대항해 시대의 동남아시아’는 출판사 두 곳에서 판권을 샀다가 제작을 포기했다”며 “계획대로 내년에 출간하면 10년 만에 한국 독자들과 만나는 셈”이라고 소개했다. 노의성 사이언스북스 주간은 “2017년 출간한 ‘실버 스푼’은 국내 출판사들이 오래전부터 탐냈으나 ‘몇 번 만져보다 엎은’ 아이템”이라며 “9만9000원에 달하는 가격에도 1만 명 이상의 독자로부터 선택받았다”고 전했다. 또 1차 번역본이 ‘수준 미달’인 경우 편집자들이 일일이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하는데, 이 과정에서 번역자가 중도 포기해 대타가 투입되는 경우도 흔하다는 게 편집자들의 설명이다.

큰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책도 많지만, ‘대박’을 낸 고가의 벽돌책은 출판사의 몇 년 치 살림을 책임지는 ‘기둥’으로 대우받는다. 대표적 사례가 2014년 출간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원래 글항아리는 3000부 판매를 목표로 판권을 샀는데 그사이 불평등·양극화가 시대적 화두로 부상하고 책이 해외에서 유명해지면서 무려 11만 부가 나갔다. 이 편집장은 “통상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판권 가격이 7000만~1억4000만 원 수준에서 형성된다”며 “‘21세기 자본’은 글항아리 외에 판권 경쟁에 뛰어든 회사가 없어 ‘단돈’ 700만 원에 계약했다”고 말했다. 어마어마한 수익이 나면서 출판사 대표가 직원들에게 ‘소고기 1000만 원어치 회식’을 쐈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또 김영사의 ‘카를 융-기억, 꿈, 사상’처럼 판권 유지를 고민할 정도로 수익률이 저조했으나 ‘글로벌 아이돌’ 방탄소년단(BTS)이 ‘영감을 준 책’으로 언급하며 판매량이 급상승한 사례도 있다.

◇“벽돌책만이 담아내는 다면적 진실·깊은 사유”

가벼운 ‘숏폼’ 형태의 문고판으로 축소되는 독서 시장에 대응하는 출판사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벽돌책이 갖는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장강명의 벽돌책’이라는 일간지 칼럼을 연재 중인 소설가 장강명은 “진부한 메시지나 단순한 아이디어는 ‘짧은 팸플릿’에도 실을 수 있지만 다면적 진실과 깊은 사유의 과정은 ‘분량이 긴 책’에만 담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200쪽엔 담을 수 없는 사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200쪽짜리 책 네 권을 읽는 것과 800쪽짜리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고 덧붙였다. ‘K-를 생각한다’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한 임명묵은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인생 책’으로 꼽으며 “벽돌책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 서너 권을 읽은 듯한 포만감을 안겨준다”며 “한 주제를 놓고 ‘끝장’을 보는 경험은 벽돌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있어 보이는 취향’에 대한 동경이 벽돌책 수요로 이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는 “장서가들은 십자가·성모상 등 종교적 성물(聖物)이나 대형 미술품처럼 경외심을 갖고 벽돌책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며 “책을 장식장 안에 고이 모셔두며 ‘지적인 가치’에 대한 선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독서 시장이 얇고 가벼운 에세이 위주로 재편돼 두꺼운 ‘벽돌책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한 편집자는 “벽돌책의 핵심 독자층은 50~60대인데 최근 2030 여성에게 호응이 높은 에세이가 시장의 주류로 자리매김하며 많은 출판사가 ‘개인의 내밀한 고백록’에 집중하고 있다”며 “벽돌책은 앞으로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강 대표의 시대 전망은 다르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교양서를 읽으며 ‘구력’을 쌓은 ‘전문독자’ 수는 예전보다 늘었다” “시장의 변화에도 벽돌책 수요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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