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 한땀' 60년.. 해외 명품 넘을 'K-양복' 꿈꾸다

송영규 선임기자 2021. 9. 2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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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명장을 찾아서] 이정구 골드핑거 대표
가난 탓에 12살부터 양복점 생활
국제기능올림픽 金메달 등 경력 화려
MB·JP 등 거물 정치인들 고객으로
29년 데이터 담은 재단시스템 개발
"비대면 시스템으로 해외 판로 뚫을 것"
이정구 명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 골드핑거 매장에서 재단을 하고 있다.
[서울경제]

서울 멋쟁이들이 모인다는 강남 코엑스 지하 쇼핑몰 북쪽. 화려한 컬러를 자랑하며 즐비하게 늘어선 해외 명품 매장들을 지나면 영화 ‘킹스맨’을 닮은 매장이 나타난다. 양복점 ‘골드핑거’. 안에 들어서자 깔끔한 와이셔츠와 넥타이 차림의 70대 신사가 맞이한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선정한 대한민국 명장 310호 이정구(71) 대표다.

60년간 한 땀 한 땀 수제 맞춤 양복을 만들어온 이 명장의 경력은 화려함 그 자체다. 지난 1970년 도쿄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고 1986년에는 한국남성복기술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석탑산업훈장 수훈, 산업현장교수·백년소상공인 선정 등도 뒤따랐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종필·진념 전 국무총리, 강창희 전 국회의원 등이 그의 고객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명장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재단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열두 살이던 1962년 동네 양복점에서부터. 4년 뒤 새벽에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와 1968년 당대 최고 재단사였던 이용화 명장 밑에서 일을 했다.

도쿄 국제기능올림픽의 금메달은 그의 인생에 일대 전환점이 됐다. 이 명장은 27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고급 정장은 지식층이나 상류층이 주로 이용하는 만큼 인맥이 중요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나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며 “기능올림픽 금메달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술회했다.

이정구 명장이 서울 삼성동 코엑스 골드핑거 매장에서 자신이 받은 상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명장에게 정장 한 벌을 받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치수 재기-가봉-수정’을 거쳐 본격 제작까지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탓이다. 바지에 하루, 상의에 사흘 등 총 닷새를 기다려야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중간 수준의 정장 한 벌에 150만~200만 원, 손이 많이 가는 것은 300만 원이 넘는다.

장년층 이상만 그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요즘은 4차 산업혁명 관련 산업이 뜨면서 젊은 최고경영자(CEO)들도 합류했다. 그는 “정보기술(IT) 분야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1년에 10벌씩 구매하기도 한다”며 “이들의 비중은 점점 늘어 요즘은 20~25%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이정구 명장의 둘째 아들 이필성 실장이 캐드(CAD) 시스템 기반 재단 설계도 제작 프로그램 ‘마스터 테일러’를 위한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다.

고희(古稀)의 나이지만 이 명장의 가슴에는 아직도 열정이 가득하다. 특히 최근 기술 발전에 대응하려는 노력은 웬만한 청년들 못지않다. 29년간 축적한 3,500여 명의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둘째 아들 이필성 실장과 함께 개발한 캐드(CAD) 시스템 기반 재단 설계도 제작 프로그램 ‘마스터 테일러’가 대표적 사례. 이 프로그램은 고객의 치수와 원하는 바를 입력하면 재단 설계도를 바로 출력한다. 그는 “전문 지식과 IT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현장 경험이 없고,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IT 능력이 없다”며 “마스터 테일러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는 세계 유일의 재단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국내 시장에만 매달리던 기존 양복 산업의 한계도 이 명장이 극복하려는 대상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양복이 해외 명품보다 낫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그는 “우리가 해외 명품보다 훨씬 잘 만들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약하다는 게 문제”라며 “비대면 맞춤 시스템을 통해 이들과 경쟁하고 수출 길을 열려고 한다”고 말했다.

메타버스도 그가 요즘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영역 중 하나다. 이 명장은 2~3년 내 아바타가 아니라 자기 몸을 그대로 가상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비해 해외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치수를 입력하면 그에 꼭 맞는 옷을 제공하는 비대면 맞춤 정장 애플리케이션을 개발 업체에 의뢰하기도 했다. 그는 “비대면 맞춤 정장 앱은 조만간 개발이 완료될 것”이라며 “해외로의 판로 확대가 머지않았다”고 자신했다.

이 명장은 양복 산업 발전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일부 업종은 선진국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아직 많은 분야는 그렇지 못한 상태”라며 “정치 싸움만 할 게 아니라 많은 업종을 같이 키워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정구 명장
송영규 선임기자 sk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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