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봉총 금관 '사상 첫 미술관 나들이', 현대미술품과의 만남은 글쎄..

노형석 2021. 9. 28.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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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전
기획전 ‘디엔에이(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의 4부 전시장 모습.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5세기 고신라 금관(오른쪽)과 이수경 작가의 신작 조형물 <달빛왕관-신라금관 그림자>가 서로 마주 보듯 배치되어 있다.

1926년 식민지 조선을 방문했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브는 경북 경주읍 노서리 신라고분 발굴 현장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금관을 들어 올렸다. 사슴뿔과 나뭇가지 세움 장식에 봉황이 달린 서봉총 금관이다.

신라 금관을 대표하는 이 보물이 지금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들어와 있다. 사상 처음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 옮겨져, 현대 작가인 이수경씨가 신라 금관을 모티브로 만든 현대 조형물과 나란히 마주 보며 관객들을 맞는 중이다. 덕수궁관에서 지난 7월부터 열리고 있는 ‘디엔에이(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전(10월10일까지)은 국립박물관의 국보·보물급 문화유산 명품들과 근현대 미술 명작들이 나란히 자리한 역대 최초의 협업전시다.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전통 미술과 20세기 이래 근현대 미술의 관계를 ‘성스럽고 숭고하다(성聖)’ ‘맑고 바르며 우아하다(아雅)’ ‘대중적이고 통속적이다(속俗)’ ‘조화로움으로 통일에 이르다(화和)’란 열쇳말로 살피며 한국미의 뿌리를 짚어본다는 취지다.

전시장에선 유명한 거장과 옛적 명품들이 곳곳에서 어울리고 있다. 우주적 세계를 펼치는 김환기의 1970년대 푸른빛 점화 대작 아래로 흰 백토 바탕에 동심원 같은 모양을 이루며 온통 점으로 채워진 분청사기 인화문 자라병이 빛난다. 동심의 세계를 표상하는 이중섭의 푸른빛 아이들 그림 아래엔 동자의 형상이 꽃 사이로 음각된 고려청자 주전자들이 자리한다. 원색의 채색으로 덮인 왕실 그림 <일월오봉도> 뒤쪽엔 붉은 햇살과 푸른 산이 물결치는 유영국의 그림이 있다. 채색화 대가 박생광이 단청을 연구한 드로잉 작업도 볼 수 있다. 경주 석굴암 본존불의 미소를 부각시킨 문화재 사진가 한석홍과 국립박물관 소속 사진가였다가 전시에서 재조명된 이건중의 백자, 불두 사진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각 거장 권진규가 1971년 만든 목조불상. 3부 전시장에 나왔다.

이런 근현대 거장과 전통 예술가들의 명품들은 어떤 경로로 인연이 이어지며 조응하게 됐을까. 이를 전시에서 보여주고 맥락을 찾는 것이 미술사 연구자와 큐레이터의 임무다. 이번 전시는 이런 과업이 충실하게 실행됐다기보다 시각적으로 비슷하거나 이색적인 것만 연결해 보여주고 세부는 얼기설기 마무리 지은 인상을 준다.

고미술과 근현대 미술품의 조형적 유사성에 주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김환기가 우주적 세계와 고국에 대한 향수를 모아 노동집약적으로 고투하며 점을 찍은 것과 조선 도공이 상전의 주문에 요령껏 응하기 위해 분청사기에 도장 찍듯 점을 찍은 것은 의도와 배경이 전혀 다르다. 비슷한 형상의 연원을 따지려면 그 막후에 흐르는 정신사와 도상학에 대한 심층 분석이 따라붙어야 한다. 막연한 디엔에이의 유사성에만 착근하는 것은 태만하고 안일하다는 지적을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백자와 청자, 불화 등과 근현대 추상, 구상 그림들이 입체적으로 배치되면서 색다른 감흥을 이끄는 전시의 재미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도상적 유사성에만 기대어 모호한 연관성을 끌어내는 방식은 전시 곳곳에서 지루하게 되풀이된다.

그동안 수묵화·산수화에 밀려 소외됐던 채색화·민화 흐름의 줄기를 좀 더 확장시켜 보여주지 못하고, 또 다른 전통 계승의 맥락으로 미술사의 범주에 포괄되는 1960~80년대 민족기록화 부분, 근대 작가들에게 전통 인식의 기점이 되었던 1930년대 조선향토색 논의 등에 대한 언급이 상당 부분 빠져 있다는 점도 눈에 걸린다. 지금 미술시장에서 한국 전통 사상과 현대 추상회화가 어울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사조로 인정받고 있는 단색조회화(모노크롬) 작가들의 벽지 같은 그림들은 왜 비중을 두고 다루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고미술과 현대미술에 걸친 개별 명품들의 단면들을 대조하고 음미한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덕수궁 석조전 앞에 놓인 지니서의 설치작품 <일보일경>(一步一景/驚, 2020~2021). 바람에 빛을 내며 움직이는 구리큐브들이 장대에 매달려 그물선 같은 그림자를 이루며 덕수궁의 시간성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라고 미술관 쪽은 설명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의 현대미술 기획전을 연상시키는 덕수궁 야외설치전(11월28일까지)은 2012년 첫 전시 이래 올해가 네번째다. 작가 9팀(10명)이 ‘정원’을 주된 화두로 삼아 비운의 덕수궁 역사를 재해석한 작업들을 펼쳐놓았다. 구리큐브들이 장대에 매달려 그물선을 이루며 작품 배경인 궁의 시간성을 일깨워주는 지니서의 설치작품, 전각 앞 뜨락에 신선계를 상징하는 괴석과 사슴상을 놓은 김명범 작가의 설치물 등이 나왔다. 2017·2019년 전시 때와 거의 같은 공간에 비슷한 얼개로 배치된 작품들은 또 다른 볼거리 구실을 하지만, 영상·설치·조형물 위주의 진부한 장르 안배와 궁궐비사 콘텐츠 구성이 되풀이되는 한계도 여실하게 드러낸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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