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호박죽 한 그릇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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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넉 달 앞둔 가을, 혼자 집 근처 국숫집에 갔다. 통영 멸치로 육수를 진하게 우려내고 김치와 고춧가루도 국내산을 쓰는 깔끔한 가게였다. 국수가 두어 젓가락 남았을 때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던 여(女)사장님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성님~ 나가 늙은 호박에 찹쌀 듬뿍 넣어서 호박죽을 겁나게 마싰게 끓였소. 들통으로 하나 가득 팔팔 끓였당께. 얼릉 와서 퍼 가쇼!”
내가 참 좋아한다, 호박죽을. 마침 가게에 손님은 나 혼자고, 들통으로 끓였다길래 혹시 기대했다. “아가씨 죽 한 그륵 하실라요?” 물어봐주기를. 그러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났다. 시간은 흘러갔고 곧 ‘성님’이란 분이 호박죽을 한 냄비 가져갔다.
국수 그릇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고, 더 이상 반전은 없어보였다. 조심스레 주방으로 다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사장님…” “맛있게 드셨어요? 5000원입니다” ‘이, 이게 아닌데….’ 지갑에서 천천히 돈을 꺼내며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참 면구스러운데요. 실은 제가 호박죽을 정말 좋아해서요. 많이 끓이셨다길래, 그 호박죽을 제게 조금만 파실래요?!”
사장님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목젖이 보이도록 웃었다. “아이고 아가씨 거 말 한번 잘하셨소! 그래, 사람 입이란 이렇게 말을 하라고 달려있는 거시요! 그래야 호박죽이라도 한 그륵 얻어먹지, 말을 안 하믄 어찌 안다요? 말 안 했으믄 아줌니들 진짜 너무한다 그거 한번 먹어라 말을 않네, 그러고 집에 갈 뻔하지 않았소. 그러고 가면 거 잠잘 때 생각나요 아이고 그 죽 하면서. 아줌니 여기 아가씨한테 퍼뜩 죽 한 그릇 퍼 주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박죽이 마침내 내게 왔다. 숟가락으로 죽을 봉긋하게 떠서 후후 입김을 불었다. 호박죽의 달콤한 풍미가 코를 자극했고, 곧 목구멍으로 스며들었다. 굳이 웃으려 한 것도 아닌데 ‘후훗’ 웃음이 나왔다.
나는 여전히 호박죽을 좋아한다. 엊그제는 시어머니께서 늙은 호박을 한 덩이 주셔서 껍질을 벗겨내고 새알심을 빚어 죽을 끓였다. 호박죽을 떠서 입에 넣으려니 수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렇게 호박죽의 달콤한 풍미와 따스했던 추억을 함께 입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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