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시가 내게로 왔다

- 2021. 9. 27.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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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봉
태초에 그것은 은행잎이었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것이 내게로 왔다
 
어디로 향하는 노란 길일까
누가 시를 내 앞에 융단처럼 포근히 깔아놓은 걸까
 
태초에 나뭇잎은 숟가락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연포탕 기막힌 국물 맛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한 줄 시가 되어 밥상 위에 뒹구는 저녁이다
 
오래 기다린 시가 저절로 나를 찾아왔지만
어떻게 요리해 먹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풀리고 열린 하늘, 유성들,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 도는 밤에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나뭇가지에 노랗게 매달려 있는 은행잎을 보고

시가 내게로 왔다고 합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노란 나뭇잎이 어디로 향하는지 응시하다가

노란 은행잎을 숟가락으로 상상력을 넓힙니다.

시를 쓰는 일이 수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동안 올 수 있고,

연포탕이 목구멍을 넘어가다 기가 막힌 시 한 줄이 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시인들은 오래 기다리던 시가 찾아왔지만,

그 시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포근한 융단처럼, 아니면 뜨거운 연포탕처럼 영혼이 시키는 대로,

해독하면 시의 첫 줄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박미산 시인, 그림=림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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