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은의멜랑콜리아] 방탄소년단과 대통령특사

- 입력 2021. 9. 27. 23: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특별사절로 유엔서 연설
정치의 심미화에 이용당해 불편
BTS 행보 하나하나 정치 영향력
예술 자체로 '희망의 메시지' 기대

아이돌이 아니었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10대 팬덤 문화의 주역이 아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청년들에게 영향력이 덜한 뮤지션이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런 가정은 지도자에게 실망하기 싫은 국민의 방어기제일 뿐이다. 만약 대통령이 중년의 트로트 가수를 특사로 삼고 유엔에 동행했다 한들 우리는 그 광경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방탄소년단이 대통령 특별 사절로 유엔에서 연설할 때 불편하고 어색했다. 객석이 텅 비어서도 아니었다. 들어줄 관객이 없는 권위의 장소에서 그들이 퍼포먼스를 너무 열심히 해서도 아니었다. 연설 내용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이 정치의 심미화에 이용당한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작가
예술의 정치화는 있을 수 있다. 순수한 예술이란 없다. 예술 앞에 ‘순수한’이라는 형용어구를 붙이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다. 그렇다고 정치가 예술을 이용해 심미화를 꾀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정치화’는 ‘정치의 심미화’와는 다르다. 방탄소년단이 영향력 있는 뮤지션으로 유엔에서 연설하는 것은 예술의 정치화이다. 그러나 대통령 특사라는 임명을 받고 그 자리에 섰다면, 그것은 권력자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절일 뿐이고, 그것은 청와대가 방탄소년단을 정치의 심미화에 이용한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단독으로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면,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면, 그것은 반갑고 감동적인 이벤트였을 것이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더 중요해질 때가 있다. 적어도 대통령이 방탄소년단을 소개할 때 “대통령 특별 사절로 함께 한다”로 시작하지 않고, 방탄소년단도 “대통령 특사 방탄소년단입니다”로 시작하지 않았다면, 방탄소년단이 주체적으로 예술의 정치화를 이룬 것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때 대통령의 방탄소년단에 대한 칭찬과 감사는 더 빛났을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그들의 예술 자체로 정치적이다. 그들은 비틀스가 그랬듯이 이 시대 예술의 정치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비틀스는 미국 공연장의 인종 분리에 반대했었다. 많은 미국인을 도발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만약 인종에 따라 객석을 분리한다면 공연을 할 수 없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비틀스가 활동한 1960년대는 광기와 갈등의 시대였다. 냉전으로 인해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됐으며, 베트남전쟁이 악화되고 있었다. 인권운동과 여성해방운동, 동성애 차별 반대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 상황 위에 비틀스가 있었다. 이 보이그룹은 동시대인에게 희망과 우정의 메시지를 전했고 사람들은 이들의 코러스를 따라부르면서 불안과 고통을 발산했다. 미국이 아닌 영국의 시골 리버풀 출신에, 바가지머리와 정제되지 않은 제스처로 “예 예 예”(She Loves You), “나 나나 나나나 나”(Hey Jude) 코러스를 할 때 팬들은 연대감을 느꼈다. 비틀스와 팬들이 만드는 그 공간은 차별이 사라져 있었다.

노래를 함께 부를 때 우리는 연대감과 희망을 느낀다. 우리는 노래하는 자를 응원하는 마음이 되고, 이 마음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그들을 응원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유튜브채널 ‘방탄TV’에 활동 비하인드 영상 ‘방탄밤’이 올라오고, 블로그에 멤버 개인의 일상 이야기 ‘로그’가 전해질 때 ‘우리’라는 정체성이 더 강화된다. 대한민국의 청년 뮤지션이 팝시장 중심 미국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 가능한 플랫폼에 음악과 일상을 전할 때 그들의 희망이 팬들의 일상에 흘러든다.

방탄소년단이 만드는 건강한 판타지가 그들의 정치성이다. 우리는 권력자의 정치 때문이 아니라 젊은 예술가의 정치성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때때로 예술이 만드는 판타지 때문에 지독한 현실을 견딜 수 있다. 예술적 판타지는 망상이 아니라 통찰력 있는 희망이 만들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뿐이랴, 대한민국에는 아름다운 뮤지션이 많다. 그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예술 그 자체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이 정치성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권력다툼이 만든 정치보다 더 힘이 세다. 2012년, 이명박 정권 말기엔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차용한 ‘오빤 MB 스타일’이란 노래가 유튜브에 올라왔었다. 이 패러디곡이 원곡보다 더 정치력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정치의 심미화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라면, 파시즘의 전략이다. 정치의 심미화로 국민에게 즐거움이나 감동을 선사하려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의 파생이다.

비틀스는 필리핀 영부인 이멜다의 초대에 거절했다가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65년에는 대영제국 최고훈장을 받았지만, 영국이 미국의 월남전을 지원하자 존 레넌은 그 훈장을 반납했다. 훈장을 받을 당시 “또 다른 목표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공작(Duke)이 되고 싶다”며 권위에 반하는 유머를 던졌던 존이었다. 비틀스는 1970년 공식 해체까지 7년 7개월 활동했다. 그들의 마지막 무대는 런던 사무실 옥상이었다. 그 작지만 열린 공간이 바로 그들의 메시지였다.

방탄소년단이 어떻게 성장해갈지 기대된다. 이들은 데뷔 8년 차이다. 막내 정국은 데뷔 당시 열여섯 살이었다. 이제 그들도 보이그룹의 틀을 깰 것이다. 비틀스가 비틀스를 벗어남으로써 비틀스로 남았듯이 방탄소년단도 방탄소년단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We don’t need permission to dance”(우리의 춤에 허락은 필요 없어), 방탄소년단이 유엔에서 부른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유엔총회장에서 울려 퍼진 이 가사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한귀은 경상국립대 교수 작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