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의 여행이라는 꽃다발 <6> 경북 영주] 노을은 붉었고, 숲길은 고요했네

최갑수 입력 2021. 9. 27.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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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노을. 사진 최갑수

1999년 여행기자가 되어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밥을 버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후 지금까지, 부석사라면 열서너 번은 취재를 하러 갔던 것 같다. 지겹도록 갔지만, 그때마다 부석사가 좋았고 또 좋았다. 무량수전 옆 석탑에 앉아 소백산맥 위로 아득하게 내리는 노을을 바라보았던, 사과꽃이 하얗게 피었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던, 발목까지 눈이 쌓였던, 부석사를 찾았던 날들.

부석사, 노란 은행나무길 끝에 자리한 절집. 저물 무렵이면 소백산맥을 넘어온 장엄한 노을이 절집 앞마당에 내려앉고 법고와 목어 소리가 울려 퍼진다. 부석사의 압권은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일 것이다. 최순우 선생이 그의 책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에서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썼던 그곳. 실제로 그곳에 가보면 어떤 미학적 수사도 필요 없는 순전한 아름다움 앞에 그만 마음이 먹먹해지고 만다.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에는 부석이라는 돌이 있다. 커다란 암회색의 바윗덩어리다. 이 바위에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의상을 사모한 선묘낭자가 몸을 던져 바다의 용이 돼 의상의 뱃길을 지켰다고 한다. 도적의 무리가 사찰 창건을 훼방 놓을 때 거대한 바윗돌을 띄워 도적을 물리쳤다. ‘부석(浮石)’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부석사에서는 꼭 저녁까지 기다린다. 해 질 때 무량수전 앞에 선다. 소백산맥 능선 너머로 해가 진다. 바람이 무량수전 풍경을 흔들고 지나간다. 황금빛 노을이 배흘림기둥을 비춘다. 사람들은 부석사 앞마당에 앉아 노을을 맞는다. 법고 소리가 울린다. 목어가 울리고 운판이 운다. 네발 달린 짐승과 물고기들 그리고 날짐승들의 죄를 씻어주는 소리. 사람들의 죄는 누가 씻어주나. 그런 생각이라도 하듯, 법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아무도 말이 없다.

경북 영주에 있는 부석사 가기 전, 소수서원도 들러보자. 1543년 주세붕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풍기군수였던 퇴계가 임금에게 건의,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안동 도산서원과 함께 경북 지방 대표 서원 중 하나로, 대원군의 사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곳이다. 서원은 그리 크지 않다. 가지런히 빗질 자국이 남아있는 서원에 들어서면 저절로 조심스러워진다. 소수서원이 보관해오던 유물들은 소수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 서원의 이름이었던 백운동서원의 현판, 창건자인 ‘주세붕의 초상(보물 제717호)’, 고려 시대부터 주자학의 기초를 닦은 ’회헌 안향의 초상(국보 제111호)’ 등 창건 이후 서원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서원 앞의 죽계천 너머에 있는 취한대란 자그마한 정자가 예쁘다. 선비들이 지친 심신을 달래려 잠시 쉬던 곳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앞. 사진 돌다리
죽령옛길. 사진 최갑수

걷기 좋은 구월의 숲길

영주에는 국립산림치유원이 있다. 숲의 치유인자를 활용해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와 심신 안정을 위한 적절한 운동과 생활습관 개선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 일주일 정도 묵으며 산림 치유를 할 수 있지만 주변에 조성된 숲길만 걸어도 산림 치유 효과를 체험하는 데 모자람이 없다. 마실치유숲길, 마루금치유숲길, 문화탐방치유숲길, 금빛치유숲길, 별바라기치유숲길 등의 숲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마실치유숲길’이다. 아이들도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데크로드로, 길이는 왕복 약 5.9㎞, 천천히 걸어 약 2시간이면 길을 다 걸을 수 있다.

마실치유숲길은 이름 그대로 나들이하듯 걸을 수 있는 숲길이다. 숲을 걷는 내내 맑은 새소리, 바람소리가 함께한다. 간간이 물소리도 들려온다. 심호흡을 하면 향긋한 숲 내음이 가슴속에 가득 찬다. 간혹 맨발로 걷는 이들도 만날 수 있다. 숲길 곳곳에는 쉼터가 마련돼 있다. 햇빛이 잘 드는 ‘해든솔쉼터’도 있고 풍욕장인 ‘숲바람쉼터’도 있다. ‘푸르뫼쉼터’에서는 소백산의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등 주요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다.

죽령옛길도 걷기길의 스테디셀러다. 소백산역을 출발해 죽령 고갯마루까지 약 2.5㎞. 고개에 도착해 한숨 돌리고 다시 길을 되짚어 소백산역으로 돌아오는 여정. 왕복 세 시간이면 넉넉하다. 죽령옛길은 소백산 도솔봉과 제2 연화봉 사이에 있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이 이 길을 애용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철도가 개설되고 국도 5호선이 뚫리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 경북 쪽의 죽령옛길이 복원되면서 소백산역에서 죽령 정상에 이르는 산길에 다시 길손이 붐비기 시작했다.

중앙고속도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자 사과나무 과수원이 펼쳐진다. 길은 과수원 사이를 지나 꼬리를 치며 달아난다. 지금 나무에는 연두색 사과가 잔뜩 달려 있다. 바람이 불면 사과나무가 흔들리고 사과 향이 향수처럼 뿌려진다.

길옆 평상에 사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놓여 있다. 동그란 사과 하나를 사서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은 후 한 입 베어 문다. 사과의 여린 속살이 입안에 가득 찬다. 맛있다. 달고 시다. 소백산의 계절이 한 알의 사과에 담겼다.

죽령옛길, 숲은 사과처럼 달고 시다. 걸을 때마다 짙은 풀 냄새가 콧속으로 훅훅 스민다. 물푸레나무며, 신나무, 참나무, 떡갈나무, 고추나무, 잣나무들. 그리고 으름덩굴이며 청가시덩굴이며 인동덩굴이며 칡덩굴, 종덩굴이며 노박덩굴이 다 함께 어울려 뿜어내는 숲 냄새는 달짝지근하고 또 시큰하다.

죽령옛길은 내내 오솔길이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오솔길이다. 숲은 울창해서 맵디매운 초가을 뙤약볕도 힘을 쓰지 못한다. 걷다 보면 풀숲 이슬이 바짓단을 슬며시 적시고, 어디선가 안개가 불현듯 불어오고 밀려와서 어깻죽지를 서늘하게 누르곤 한다.

죽령옛길은 내내 고요하다. 무릎을 치고 가는 흰나비의 날갯짓도 고요하고 전나무 가지를 설핏 흔들고 가는 바람의 움직임도 고요하다. 매발톱꽃과 노루오줌꽃은 고요하게 피고 사과나무밭 사과도 고요하게 열린다.


▒ 최갑수
시인, 여행작가,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밤의 공항에서’ 저자

plus point

여행수첩

먹거리 순흥전통묵집(054-634-4614)은 옛 방식 그대로 묵을 만들어낸다. 메밀가루를 물에 풀어 묵을 쑤는 것이 아니라 직접 통메밀을 맷돌에 갈아 앙금을 모으고 가마솥에 장작을 때 묵을 쑨다. 아테네레스토랑(054-633-8810)은 옛날식 돈가스를 맛볼 수 있는 곳. 영주 시민이 사랑하는 경양식집이다. 풍기역 앞 한결청국장(054-636-3224)은 부석태로 만든 청국장을 낸다. 청국장샐러드, 잡채, 두부구이 등이 한 상 차려진다. 중앙식육식당(054-631-3649)은 소갈빗살 전문점이다. 서부냉면(054-636-2457)에서는 냉면을 맛보자. 면은 메밀 맛이 짙고 한우 사골과 동치미 국물을 배합해서 만든 육수 맛도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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