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여진의 마켓잠망경 <19>] 경영진의 독선도 위험, 주주의 과잉 개입도 위험

엄여진 2021. 9. 2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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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기업의 정기 주주총회 현장. 사진은 기사의 내용과 관계 없음. 사진 조선비즈 DB
엄여진 쿼드자산운용 PEF운용본부 매니저 연세대 경영학, 전 신영증권 제약·바이오 애널리스트

최근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기업 A의 대표이사가 사퇴했다. 그동안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길 요구해온 소액주주의 압력이 대표 사퇴의 배경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시가 총액 2조원에 이르는 상장기업 B는 보유 지분 비율이 80%가량 되는 소액주주들이 주가 하락 가능성을 이유로 반발하는 바람에 전환사채(CB) 1200억원 발행 계획을 없던 일로 했다. 상장한 지 15년이 넘은 시가 총액 1조원 규모의 상장사 C는 소액주주 요구에 핵심 경영진을 물갈이했다. 상장기업 D는 전환사채 발행으로 연명 중인 사실상 껍데기뿐인 회사다. 그런데도 이 업체 대표이사는 사업을 확장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위 사례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갈린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기업 경영의 최대 화두인 요즘 같은 세상에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가 활성화하는 걸 긍정적으로 보는 이가 있는 반면, 강성 주주가 회사 운영에 불필요하게 개입할 뿐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다. 우리는 기업과 주주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기업 성장과 함께 주주 가치도 커지는 그림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이 성장하지 못하거나 주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할 때 주주행동주의는 순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국내 기업에 대한 국내외 연기금·금융기관 등 기관투자자와 외국인의 투자 비중이 커졌다. 이 중 기관투자자들은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의결권 행사를 통해 국내 대기업의 특수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내에서는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강조하는 주주행동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기존에는 주주행동주의에 관한 주요 사안 대부분이 기업 집단의 지배구조나 사업구조, 자산·부채 등 재무구조의 개선과 관련됐었기에 회사 분할 또는 합병 등의 구조 개편과 이사회 구성, 주주 환원(shareholder return) 정책 등이 현안으로 채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에는 주주행동주의가 회사 운영 등 일상적인 경영 활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인수합병(M&A), 회사 영업, 자산 관리, 투자, 배당, 자기 주식 취득·소각, 경영진 선임 등 경영 전략 전반에서 주주 목소리가 커졌다. 기업의 사업 개발, 재무 상황, 연구개발(R&D) 방향 등에 대해 의견을 낼 뿐 아니라 주주 환원에 대한 요구도 활발하다.

주주 권리를 강화하는 입법과 규제가 늘어나는 등 자본시장 환경이 변하면서 상장기업의 역할도 적극적으로 바뀌는 추세다. 상장기업은 국내외 여러 주주와 소통해 합리적인 주주 의견을 경영에 반영하고, 자본시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기업과 경영진에 대한 자본시장의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기업 가치와 주주 가치를 제고하는 일이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 경영을 보다 투명하게 하고 자본시장을 건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문제는 주주 가치와 기업 가치의 간극에서 온다. 최근 대기업 보유 지분율이 5%도 되지 않는 해외 헤지펀드가 대기업이 보유한 바이오 자회사의 지분을 팔아 주주에게 배당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기관투자자든 소액주주든 일부 주주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행동이 꼭 해당 기업의 미래 이익 전체를 대변하는 건 아니다. 기업 주가는 기업의 미래 이익에 대한 시장 기대치를 반영한다. 주주들이 원하는 대로 구조를 개편하고 투자를 단행했으나 기대와 달리 주가가 급락하고 맥을 못 추는 사례는 늘 있다.

이는 주주의 정보력이나 전문성이 회사 경영진보다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다. 회사의 장기적인 연구개발 전략을 결정하고 인력을 채용함에 있어서 주주는 경영자보다 미흡할 수밖에 없다. 특히 바이오 기업은 뛰어난 소수 경영진의 역량과 비전을 내세우는 일이 많은 만큼 기업의 미래 가치가 이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바이오 기업 대부분은 여전히 대표이사가 창업자이자 개발자인 초기 기업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영진을 기업 가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기업 가치를 위한 최선의 판단을 꼭 경영진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시장은 경험해 왔다. 일부 경영진은 사익과 배치되면 주가를 올리는 일에 비협조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주주행동주의의 긍정적인 사례를 보자. 미국 바이오 기업 이뮤노메딕스(Immunome-dics) 사례는 전문성을 가진 경영진이라고 해서 기업 가치 증대를 위한 판단을 주주보다 더 잘 내린다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2017년 2월 이뮤노메딕스는 시애틀 제네틱스(Seattle Genetics)에 항암제를 라이선스 아웃(개발·제조·상업화에 관한 독점적인 권리 판매)했다. 계약 조건은 시애틀 제네틱스가 이뮤노메딕스에 2억5000만달러(약 2926억원)의 현금과 최대 17억달러(약 1조9899억원)의 마일스톤(단계별 지급금), 두 자릿수 로열티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또 이뮤노메딕스의 회사 지분 9.9%도 시애틀 제네틱스에 주당 4.9달러에 매각하기로 했다.

계약 조건이 공개되자 이뮤노메딕스 투자사 중 하나인 벤바이오(Ven Bio)가 이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반대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표적인 주주행동주의 헤지펀드인 벤바이오는 이 계약의 규모가 계약 대상인 신약 후보 물질의 가치와 비교해 지나치게 작고, 다른 인수 가능 기업들과 충분히 협의하지 않았으며, 시애틀 제네틱스가 이뮤노메딕스에 지분을 투자한 가격도 할인율이 너무 높아 기존 주주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벤바이오는 이뮤노메딕스가 라이선스 아웃 계약을 취소하고 해당 신약 후보 물질을 직접 개발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라이선스 아웃 계약은 벤바이오의 요구대로 취소됐다. 이 결정이 옳았는지 여부는 향후 신약의 매출이 나오고 나서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2020년 9월 길리어드가 이뮤노메딕스를 주당 88달러에 인수하기로 했었는데, 과거 시애틀 제네틱스의 제안 가격이 4.9달러에 불과했던 것을 놓고 본다면, 당시 경영진이 판단했던 기업 가치가 너무 낮았고 주주가 예상한 기업 가치가 현재 가격에 더 부합하는 것은 분명하다.

라이선스 아웃이 실제 가치보다 낮다는 이유로 주주가 계약을 취소시키기까지 한 사례를 보면, 경영진이 단기 수익과 성과를 올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회사의 본질적 가치 상승에 힘쓰라는 주주의 따끔한 경고는 그 의미가 크다. 주주 가치와 경영진의 이익 그리고 회사의 가치는 상황에 따라 상이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주주와 기업의 끝없는 줄다리기를 항상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기업 가치를 증대시키는 방안을 어느 한쪽이 다 쥐고 있지 않다. 그래서 주주가 잘 봐야 한다. 기술도 없으면서 CB로만 연명하는 회사라면 경영진을 쫓아내고 경영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대표이사의 언변이 부족하고 묵묵하게 연구개발에만 매진하느라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회사라면 주주가 인내심을 갖고 좀 더 기다려주기도 해야 한다. 단, 아무리 본업에 충실한 기업이라고 해도 기업공개(IPO)로 막대한 자금을 받은 상장기업이라면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주가를 관리해야 한다. 이게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걸 잊어버리는 회사가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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