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문창살로 비치는 달빛·노을을 추상화로
1960년대 초기 추상작품부터
최신작 포함 37점 개인전 열어
한국적 아름다움을 화폭 담아
1975년 도쿄화랑 '흰색'展 후
단색화 선두주자로 활동해
서울 PKM갤러리 개인전 '동시성-무한계'에서 만난 서 화백은 "집안에 있던 도자기와 책가도, 안마당 우물, 된장과 고추장 익는 소리, 빨랫감을 희게 하는 다듬이 방망이질 등이 나에게 귀의해 한국적인 것을 그리게 했다"고 말했다.
문창살이 여과한 빛은 그의 작품에서 네모꼴 형태로 번진다. 창호지를 통해 걸러진 빛이기에 분홍색과 하늘색 등 중성을 띤다. 작가는 "내 그림에 원색은 없다"며 "색을 중성화시켜 뽀야면서도 잔잔한 색으로 만든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기 작업부터 올해 최신작까지 37점과 미공개 자료들을 펼친다. 그가 50여년간 작업해온 '동시성(Simultaneity)' 연작을 되돌아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동시성은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피안의 세계를 작가라는 매개체를 통해 동일하고 균등한 시공간 속에 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년 시절 기억에 있던 한옥 공간의 색과 형태, 정서가 끊임없이 걸러지고 경계가 허물어져 오묘한 빛깔로 남아 있다. 전통 미학을 세련된 현대 감성으로 표현한 그의 예술 세계는 한국 현대미술 역사에서 독창적 한축을 담당하는 동시에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띠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오리진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우리 것을 찾자는 예술 사조에서 비롯됐다. 서 화백은 "청년 작가들이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됐나를 고민한 끝에 한국 전통에서 정체성을 찾았다"며 "1960~1964년 홍익대 재학 중에 신촌 봉원사 단청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전통 오방색을 연구했다"고 말했다.
한국현대판가화협회도 우리 판화 정통성을 살리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 등 우수한 한국 목판화 기술이 일본 강점기 말살됐기에 다시 복원하고 발전시키는데 앞장섰다. 서 화백은 "판화를 가르쳐주는 분도 없어 독창적으로 기법을 만들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드로잉 작업 역시 전통 한지 특성을 활용했다. 송곳으로 한지를 찍어 재질을 바꾼 후 연필과 색연필로 그렸다. 작가는 "종이 성격을 바꿔 밀도와 농도, 채도, 강도, 감성을 조합했다"며 "드로잉과 판화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정신성을 새롭게 표현했다. 드로잉은 자유롭고 감정적인 표현이 가능하며, 판화는 치밀성과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75년 도쿄화랑에서 박서보·권영우·허황·이동엽과 함께 작품을 펼친 그룹전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은 오늘날 단색화 열풍의 시작이다. 야마모토 다카시 도쿄화랑 회장이 그의 작업실로 와서 일본에 없는 한국적 흰색에 매료돼 전시가 성사됐다. 당시 출품했던 1973년작 '동시성 73-14'는 2020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구입해갔다.
초창기에는 기하학적 추상으로 선이 분명했지만 2000년부터 경계가 허물어진 해체적 추상으로 넘어갔다. 내년 화업 60년을 앞둔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사색과 명상, 묵념, 무념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9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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