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걸음이 공연이 된다..홀로 걸으며 만나는 1930년대 경성, '코오피와 최면약'
[경향신문]
이 공연에선 관객이 걷는 길이 곧 무대가 된다. 국립극단이 지난 24일 첫 선을 보인 서현석 작가의 신작 <코오피와 최면약>은 보이고 들리는 이미지와 사운드, 관객 자신의 움직임을 통해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오가는 공연이다. 관객도, 이곳에 존재하는 퍼포머(연기자)도 단 한 사람 뿐. 바로 ‘나 자신’이다. 관객은 서울역 일대를 걸으며 1930년대의 경성, 소설가 ‘이상의 길’을 가상 체험한다.
여러 면에서 독특하고 실험적인 작품이다. 먼저 공연은 극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1㎞ 남짓 떨어진 ‘서울로 7017’(옛 서울역 고가도로) 안내소가 출발지다. 관객은 휴대전화와 개인 이어폰을 소지하고 준비된 음성 안내에 따라 극장까지 걷게 된다.
안내에 따라 이어폰을 꽂자,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한 남자의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주는 것은 이상의 단편 ‘날개’(1936)의 한 대목. 옛 고가도로의 형상을 간직한 2021년의 서울, 1930년대의 경성이 겹쳐지는 독특한 체험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상의 ‘날개’에는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인 미쓰코시백화점 외에 주인공이 ‘코오피’를 마시러 자주 찾는 경성역(서울역) ‘티룸’ 등 이 일대의 여러 장소가 등장한다. 장소 특정형 퍼포먼스를 주로 선보여온 서현석 작가는 이 길을 걸었을 이상의 흔적을 좇아 ‘날개’ ‘삼차각설계도’(1931) ‘1933, 6, 1’(1933) ‘오감도’(1934) 등의 작품을 바탕으로 1930년대를 재구성했고, 현재와 중첩시켰다.
이상의 작품에서 발췌하고 재구성한 사운드를 들으며 걷는 동안 관객은 문학과 연극, 가상현실(VR)이 융합된 경험을 하게 된다. 희미하게 들리는 증기기관차 소리와 함께 눈 앞에 서울역이 등장하고, 관객은 서울역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전망대에 마련된 자리에 앉도록 안내 받는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오가는 한가로운 주말 도심의 한복판, 안내에 따라 머리에 VR 장비를 쓰자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커피 한 잔이 등장했다. 곧 이어 낯선 여인이 테이블 앞에 마주 앉고, 우리가 알던 서울의 형상이 낯선 모습으로, 때로는 180도 뒤집어진 채 펼쳐졌다. 이렇게 관객은 총 다섯 곳에서 잠시 머물며 내레이션을 듣거나 VR 장비를 통해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의 풍경을 마주한다. 최종 종착지는 백성희장민호극장. 관객은 182석 규모의 텅 빈 극장에 홀로 들어가 가상현실 공연을 보게 된다.
관객이라는 일시적 공동체가 배우와 대면하는 보편적인 연극의 장르 법칙을 깬 공연이다. 관객은 배우와도, 다른 관객과도 대면하지 않은 채 나홀로 가상의 연극에 참여한다. 관객은 ‘날개’의 주인공이 된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VR 속에서 주인공의 아내로 보이는 인물이 다가와 알약(소설에서 아스피린이라고 속인 아달린)을 건넸고, 곧 눈 앞에 나 자신으로 보이는 인물이 쓰러졌다. 한무리의 남성들이 다가와 ‘나’의 몸을 들고 간다.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희미해진 상황. 그리하여 관객은 깨닫게 된다. 이렇듯 치밀하게 설계된 세계에서, 관객은 이 모든 퍼포먼스의 일부다.
서현석 작가는 세운상가 일대를 배경으로 한 퍼포먼스 <헤테로토피아>부터 2017년 선보인 연극 <천사-유보된 제목>까지, 매회 단 한 명이 관람하는 공연을 선보여 왔다. 국립극단은 비대면 가상현실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에 대해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코로나 시대에 최적의 관람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서 작가는 이 공연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이 답답한 식민사회에서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사유를 확장시켰던 이상처럼 갑갑한 일상의 틀을 뛰어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30분 단위로 한 명씩 체험이 가능하며 사전 예약자에 한해 평일은 16명, 주말은 22명의 관객을 받는다. 공연은 10월3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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