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 사건, 북미관계 '이상한 공식'의 기원

이제훈 2021. 9. 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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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훈의 1991~2021]이제훈의 1991~2021 _12
'적대적 위기상황→대화와 협상'의 패턴은 1990년대의 '1차 북핵위기', 2000년대의 '2차 북핵위기', 2010·2020년대의 '3차 북핵위기'에서 예외 없이 되풀이돼왔다. 미국은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북은 자해공갈식 군사행동을 빼고는 미국의 관심을 이끌어낼 능력과 지혜가 모자란다는 게 문제다.
1968년 1월23일 원산항으로 끌려간 푸에블로호는, 평양 대동강 변 제너럴셔먼호 격침 기념비 바로 옆에 전시돼 지금껏 ‘안보교육장’으로 쓰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제훈 |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1993년 한겨레에 들어와 1998년부터 금강산관광·개성공단 사업의 시작과 중단, 다섯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여섯 차례의 북한 핵시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3세 승계’,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 사상 첫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을 현장에서 취재·보도해왔다. 반전·반핵·평화의 한반도와 남북 8천만 시민·인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nomad@hani.co.kr

“정선하라, 따르지 않으면 발포한다.”

1968년 1월23일 낮 12시27분 원산 앞 먼바다를 항해하던 미국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에 조선인민군 소형 쾌속 군함인 구잠정(SO-1)과 어뢰정(P-4) 등이 접근했다.

“여긴 공해다.” 푸에블로호 함장 로이드 부커는 이렇게 답신하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문제 해역을 벗어나려 했다.

문제는 속도. 푸에블로호의 최고 속도는 13노트인데 북 구잠정은 29노트, 어뢰정은 50노트. 벗어날 수 없다 판단한 부커 함장은 북 해군을 따라 원산항으로 향했다. 비밀문서를 폐기하려고 푸에블로호가 멈추자 구잠정에서 총알이 날아왔고, 선원 1명이 바로 숨졌다. 오후 2시32분 북 요원이 푸에블로호에 올랐다. 미 해군 정보수집함이 북 해군에 나포된 것이다.

미 해군 함정의 나포는 1815년 프레지던트호가 뉴욕 해안에서 영국군에 나포된 뒤 처음. 153년 만이다. 이틀 전 북의 무장공작원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려고 청와대로 가다 창의문 고갯길에서 사살된 기막힌 사건이 벌어진 터다.(31명의 무장공작원 중 29명은 사살되고 김신조는 자수, 1명은 북으로 돌아갔다)

많은 이들이 한반도에서 15년 만에 다시 전쟁이 터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김연철은 “1968년은 한국전쟁 이후 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해”라고 <70년의 대화>에 썼다.

1968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물론 북의 김일성,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중국의 마오쩌둥, 군통수권을 지닌 그 누구도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포 사건 직후 미국에선 군사 대응 여론이 들끓었다. 아이젠하워, 닉슨, 레이건 등이 군사 대응을 외쳤다. 하지만 존슨은 1월24~25일 이틀에 걸친 고위급 회의 뒤 “평화적 수단을 통한 신속한 해결” 방침을 정했다. “모든 수단을 이용”하겠다고 했지만, 그 모든 수단에 ‘전쟁’은 들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존슨은 미국이 베트남 정글에서 헤매는 와중에 또 다른 전쟁에 끌려들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북이 전쟁을 준비하거나 계획하고 있다는 정황도 없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식량이나 의약품의 수입도 없고, 무역 규모도 그대로”라며 “북한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평가했다. 비밀 해제된 미국 문서를 보면,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후임으로 정해진 클라크 클리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83명의 승조원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한국전쟁을 다시 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은 강온 양면책을 썼다. 일본을 떠나 베트남으로 가던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한반도로 돌려 대북 무력시위에 나섰다. 존슨은 사건 사흘째인 1월25일 소련 코시긴 총리한테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을 ‘공범’이라 여겼다. 맥나마라는 사건 직후 회의에서 “소련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단정했다. 억측이다. 오히려 소련은 나포 사건이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 애썼다.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그해 4월 “조선의 친구들은 소북 조약의 존재를 이용해 소련을 이 사태에 말려들게 하고,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자신들의 속셈을 우리가 지지해주기를 바란다”며 짜증을 냈다. 소련은 제네바협정 23조에 따라 군함은 영해 침범 때 나포가 아닌 영해 밖 추방이 원칙이라며 “나포는 과도한 조치”라는 비판적 견해를 북에 전달했다.

북은 왜 푸에블로호를 나포했을까? 여러 가설이 있지만, ‘사실’로 확인된 건 아직 없다. 나포는 치밀하게 기획된 일은 아니지만, 돌발 상황도 아니라는 점 정도는 분명하다.

푸에블로호는 사건 12일 전인 1월11일 오전 6시 일본 사세보항을 떠나 소련 연해주까지 북상했다 1월15일 청진항 근처까지 남하했다. 미 의회 조사보고서를 보면, 푸에블로호의 임무엔 “북한 부근에서 공공연히 활동하며 소련 해군에 대한 활발한 감시 활동을 하는 정보수집함에 북한과 소련이 각각 어떻게 반응할지를 확인한다”는 게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푸에블로호의 항적은 도발적이었고, 이게 북을 자극했을 수 있다.

북-미 양국은 겉으론 거친 말을 주고받았지만 ‘협상’의 기회를 탐색했다. 미국이 먼저 ‘패’를 깠다. 사건 다음날인 1월24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 261차 본회의에서 유엔군사령부 수석대표인 존 스미스 해군 소장은 선박과 선원을 풀어주고 사과하라고 말하고는 이런 발언 내용이 적힌 문서를 북한 대표인 박중국 인민군 소장한테 전하며 ‘미국 정부가 북한 당국에 보내는 경고’라고 강조했다. 유엔사가 아닌 ‘미국 정부’가 이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겠다는 신호다. 이런 신호를 흘려보낼 북이 아니다.

물밑 협상을 거쳐 2월2일부터 북-미 양자 회담이 시작됐다. 스미스 소장은 스스로를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서 미국 정부를 대표해 사건 협상의 전권을 행사”한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 대표는 아닌데 “미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이 얄궂은 자기소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제법적 합법성을 부인해온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와 양자 협상으로 ‘답’을 찾아야 할 현실의 절충이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계기로 한 사실상의 전후 첫 북-미 양자 협상 성사엔 문화대혁명 이후 북-중 갈등으로 군정위에 중국군 대표가 불참하던 사정도 작용했다. 홍위병이 김일성을 맹비난하자 김일성은 공개 연설에서 중국을 “대국주의자”라 비난했고, 북-중은 서로 대사를 소환하는 등 기싸움을 벌이던 터다.

북-미는 열달 넘는 힘겨루기 끝에 ‘미국의 사과’와 ‘승조원 전원 석방’ 맞교환에 합의했다. 길버트 우드워드 미 육군 소장은 “우리가 범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사과할 수 없다. 나는 오로지 승조원을 석방시킨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는 북이 작성한 ‘사과문’에 서명했다.

미국을 상대로 처절한 인정투쟁을 벌여온 북에는 ‘미국 정부의 서명’이, 미국에는 ‘부인 성명’이 중요했다. 이른바 “부인을 전제로 한 사과”(repudiated apology)다. “합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말이 웅변하듯, 외교의 세계에선 충돌을 회피하려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도 불사한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1968년 12월23일 푸에블로호의 생존 승조원 82명과 주검 1구가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고향 미국으로 돌아갔다.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다.

북은 푸에블로호 선체는 끝내 미국에 돌려주지 않았다. 1968년 원산항으로 끌려간 푸에블로호는 평양 대동강 변 제너럴셔먼호 격침 기념비 바로 옆에 전시돼 지금껏 ‘안보교육장’으로 쓰이고 있다.

반세기 전 역사를 이렇게 시시콜콜 되짚어보는 건 이 사건의 전말이 30년 넘게 한반도의 평화를 옥죄는 이른바 ‘핵문제’를 고리로 한 북-미의 갈등과 협상의 ‘역사적 원형’의 위상을 지니고 있어서다. 요컨대 “푸에블로호 북-미 협상은 적대적인 위기상황을 창출해야 대화가 시작된다는 북미 관계의 ‘이상한 공식’의 기원이다.”(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79쪽)

‘적대적 위기상황→대화와 협상’의 패턴은 1990년대의 ‘1차 북핵위기’, 2000년대의 ‘2차 북핵위기’, 2010·2020년대의 ‘3차 북핵위기’ 모두에서 예외 없이 되풀이돼왔다. 미국은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북은 모두를 인질로 잡는 자해공갈식 군사행동을 빼고는 미국의 관심을 이끌어낼 능력과 지혜가 모자란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원산과 평양을 잇는 강이 없는데,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어떻게 평양 대동강 변으로 옮겨진 걸까? 많은 이들은 철도 등 육로로 옮겼으리라 추정하는데, 북은 지금껏 푸에블로호를 어찌 옮겼는지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대북 협상에 깊이 관여해온 전직 원로 인사는 북이 육로가 아니라 해로, 곧 ‘동해→제주해협 밖→서해→대동강’ 경로로 푸에블로호를 옮겼다고 귀띔했다.

푸에블로호는 ‘잊힌 과거’가 아니다. 미국 워싱턴디시 연방법원은 2021년 2월24일(현지시각) 푸에블로호 승조원과 그 가족·유족한테 북한 당국이 모두 23억달러(2조5천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북은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이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러 평양에 갔을 때부터 북-미 관계의 고빗길마다 ‘푸에블로호 선체’를 관계 정상화의 마중물로 쓸 생각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대동강 변의 푸에블로호는 ‘김정은-바이든 회담’이라는 꽃을 피울 관계 정상화의 마중물이 될까, 아니면 또 다른 충돌과 갈등의 불씨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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