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인사이트] 당근보다 조건이 더 세다

서재준 기자 2021. 9. 2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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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제시한 김여정 담화, '희망적 읽기' 조심해야
국방력 강화 가속·제재 해제 노린 행보로 분석

[편집자주]2018년부터 북한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동북아시아 정세는 급변했다. '평양 인사이트(insight)'는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은 빠른 변화의 흐름을 진단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안한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김여정 당 부부장.©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서울=뉴스1) 서재준 기자 = 북한이 갑자기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것도 가장 권위 있는 인사 중 한 명인 김여정 당 부부장의 담화를 통해서다.

정상회담뿐만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선언 추진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지난해 파괴한 남북 공동연락사무소의 '재설치'까지 언급했다. 그러자 북한이 돌연 '유화' 모드로 돌아섰다며 전면적인 대화 국면을 예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나의 눈에는 24~25일 이어진 두 차례의 담화가 일종의 '견적서'로 보였다. 우리 정부가 원하는 대화 재개를 "들어줄 수도 있다"라며 잔뜩 제시한 이 담화에서 북한이 내민 카드들은 더 어렵고 힘든 것들로 채워진듯했다.

북한이 내민 '대화의 조건'은 '이중기준 제거'와 '적대시 철회'다. 이 두 조건의 구체적 내용은 결국 북한의 군사행보를 '가만히 두고', 대북제재를 해제하라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중기준은 최근 부쩍 부각되고 있는 말이다. 남북은 지난 15일 동시에 새 무기체계를 시험발사하는 군사 행보를 주고받았는데, 미국과 우리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 및 '제재 위반'으로 규정하고 나서자 북한은 이를 '이중잣대', '이중기준'이라고 비난했다.

김 부부장은 지난 15일 자 담화에서는 자신들의 국방력 강화 행보는 '남조선의 국방중기계획'과 같은 '국방과학발전 및 무기체계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것임을 강조했다. 국방력 강화는 모든 나라들의 기본적인 정책이니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제재 완화, 해제를 하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해석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이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은 유엔의 제재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중단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핵실험까지 '국방력 강화'라는 명분에서 재개하고 싶어하는 입장도 엿보인다.

북한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적대시 정책 철회'라는 개념도 누차 반복됐다. 이 모호한 주장의 실체 역시 요지는 '대북제재 해제 압박'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제재는 무기체계에 대한 제재보다 범위가 넓다.

북한은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때 추진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민수경제' 관련 제재 해제를 협상카드로 제시한 바 있다. 사실 북한이 더 구체적으로 제시했던 제재 해제 문제는 무기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북한은 일단 제재라는 개념 자체를 상당히 불쾌하게 보고 있다. 유엔의 제재는 물론 미국, 일본의 독자제재는 북한의 경제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는데, 북한은 이를 자신들을 '죽이려는' 적대시 정책에 따른 것일뿐 합리성이 결여됐다는 주장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김여정 부부장이 담화에서 대화의 조건으로 '공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를 요구한 것도 이 맥락에서 보면 해석이 쉽다. 북한은 지금 외부사회에서 '정상국가화'라고 부르는 틀에 더 깊게 발을 넣고 싶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 부부장의 일련의 담화는 희망적으로만 보기 어렵다. 북한이 제시한 조건들은 처음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한미의 많은 정부가 해결을 시도하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뒤 악화일로를 걷게된 문제들이다.

쟁점 없는, 논쟁 없는 외교가 어디있겠냐만은 우리가 너무 크게 보폭을 내짚었다가 벗어나기 힘든 웅덩이에 발을 들일까 우려되기도 한다.

지금은 북한이 내민 대화의 카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부각하기보다, 그들이 내민 카드가 상당한 난제임을 인지하고 그럼에도 '외교적 접근'을 위해 '선결 조건 해결' 없이도 북한이 테이블에 나오게 만드는 전략이 중요한 순간이다.

seojiba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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