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된 이에야스가 세운 신도시..귀족적인 교토와 달리 '쾌락의 문화' 번창

기자 2021. 9. 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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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사진은 도쿄 치요다구 에도성의 풍경. 오른쪽 사진은 에도 중기 우키요에 화가 도슈사이 사라쿠(위), 시인 바쇼와 그의 제자 모습. 게티이미지뱅크·위키미디어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바다의 파도 아래’(위)와 우키요조시 창시자 이하라 사이카쿠의 ‘호색한 일대기(好色一代男)’. 자료사진

■ 장은수의 지식카페 - ⑧ 에도, 욕망에 들뜬 세속 도시

히데요시가 ‘적수’ 이에야스 강제 이주… 물길 돌려 습지를 곡창지대로 바꾸는 등 노력 끝에 제1의 대도시 탄생

부를 축적한 상인·장인 등 조닌 중심 문화 형성… 막부의 취향 넘어서 세속적 삶 즐기는 하이쿠·우키요에 등 유행

에도(江戶)는 도쿄(東京)의 옛 이름이다. 에(江)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땅’이라는 뜻이고, 도(戶)는 ‘입구’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에도만에 자리 잡은 에도는 억새와 갈대가 우거진 습지였다. 1590년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강력한 적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이곳에 강제 이주시킬 때까지 에도는 황량한 시골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의 중심지는 천황이 있는 교토(京都)와 히데요시의 성이 있는 경제 중심지 오사카(大阪)였고, 에도가 있는 간토(關東) 땅은 변방에 불과했다. 드넓은 슨푸(駿府)성을 버리고 에도로 가는 것은 명백한 좌천이었다. 저항과 인내, 두 갈래 길에 선 이에야스의 선택은 앞날을 바라보면서 굴욕을 감내하는 쪽이었다. 이에야스는 비가 오면 물이 넘치는 늪지와 땅을 파면 짠물이 솟는 습지를 내려다보면서 훗날 일본 제일의 대도시를 떠올렸고, 교토를 넘어서는 새로운 천하를 상상했다.

중세 이후, 일본의 도시는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는 성, 주변의 조카마치(城下町), 그 너머의 농경지로 이뤄진다. 여기에 다이묘의 가신들이 사는 무가(武家) 지역, 신사(神社)와 사원(寺院)으로 이뤄진 곳곳의 성소(聖所)를 합치면 도시의 큰 그림이 나온다. 갈대의 땅 에도를 도시로 만든 것은 인간의 힘이었다.

이에야스는 에도만으로 흐르는 도네강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습지를 곡창지대로 바꿨고, 북쪽의 간다산을 허물어 남쪽 바다를 메운 후 그 위에 조카마치를 조성했다. 두 겹의 해자로 둘러싼 광대한 에도성 공사는 이에야스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쇼군(將軍)이 되고, 1603년 굴욕의 땅 에도에 막부(幕府)를 연 후에도 무려 30년 넘게 이어져 1636년에야 비로소 완성됐다. 이로써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이 일어나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줄 때까지 265년 동안 에도는 한적한 어촌 마을에서 인구 100만을 훌쩍 넘는 메트로폴리스로 빠르게 성장했다.

‘일동장유가’에서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인겸은 “누대와 저택이 사치하고, 남녀 인물이 번성하다”고 에도의 첫인상을 노래한 후, 이어 “성들이 장엄하고 정연하며, 다리와 배들이 특이하고 뛰어나” “오사카보다 세 배나 더하고” “세어 보면 백만으로 여럿”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도의 번화한 모습에 깜짝 놀란 것이다.

에도시대 내내 평온한 세상이 계속됐다. 해금(海禁)을 통해 서양 세력의 출입을 억제했기에 1853년 흑선(黑船)을 탄 미국이 쳐들어와 개항을 요구할 때까지 외란(外亂)도 존재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만이 나가사키(長崎)항에 들어와 교역했을 뿐이다. 동아시아 3국은 같은 시기에 평화를 누리면서 경제적 축적이 일어나고 문화가 발전하는 자생적 근대화의 길을 밟아갔다. 일본 역시 에도를 중심으로 근세에 돌입했다.

중세의 주인이 귀족과 무사로 이뤄진 무장 세력이었다면, 근세의 주인은 상인과 장인으로 이뤄진 조카마치의 주민 조닌(町人)이었다. 막부는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복장에서 직업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통제했다. 그러자 경제 발전에 따라 부를 장악한 조닌들은 권력 대신 문화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출했다. 이로써 교토의 ‘미야비(雅)’에 맞서는 에도의 ‘조쿠(俗)’가 일어섰고, 우키요(浮世)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미야비는 교토 궁정을 중심으로 하는 세련되고 우아한 풍류 문화를 말한다. ‘만요슈(萬葉集)’ ‘겐지 이야기(源氏物語)’가 대표하는 와카(和歌)와 모노가타리(物語), 한문으로 쓰인 시와 산문 등이 이 고상한 문화를 대표한다. 조쿠는 조닌의 취향이 반영된, 속되고 천박한 에도 문화의 특징이다. 가부키(歌舞伎), 라쿠고(落語·일인 만담), 하이카이(俳諧·시속 변화를 재치 있게 다룬 속어 하이쿠), 가나조시(假名草子·가나로 쓰인 단편소설), 게사쿠(戱作·통속 오락 소설), 샤레혼(酒落本·화류계 소설), 우키요에(浮世畵) 등이 이 통속적 세계를 잘 보여준다.

교토의 관점에서 보면 신흥도시 에도는 부박한 곳이고, 우아함을 모르는 변방이었다. 18세기 중엽, 천하제일 도시로 성장했으나 에도는 여전히 교토 문화를 숭상하고 동경하는 촌구석이었다. 그러나 에도에는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에 따라 머물러 사는 많은 무사가 있었다. “권력 있는 자에게는 재산이 적게, 재산 있는 자에게는 권력이 가지 않게”라는 막부의 정책에 따라 돈벌이에 나설 수 없기에 이들은 소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조닌은 이들에게 상품과 오락을 제공하면서 부를 쌓았다. 처음엔 무사들 취향에 맞춰 미야비 문화를 반입해 복제하기 급급했으나 여가와 오락을 즐길 만한 부를 쌓자 곧바로 독자적 문화형성에 나선다.

우키요는 에도 토박이인 조닌의 마음 풍경을 적확히 담아낸다. 본래 이 말은 ‘근심 많고 걱정 넘치는 세상(憂世)’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평화가 지속되고 번영이 이어지자 이 말은 마음 편하게 현세의 쾌락을 즐기자는 ‘들뜬 세상(浮世)’으로 바뀌었다. 사치에 대한 환상과 당장의 즐거움이 고상함을 압도하는 당세풍(當世風, modern style)이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에도시대 초기에 활약한 마쓰오 바쇼와 요사 부손의 하이쿠는 극도의 절제를 통해 에도의 세속적 세계에 정신적 깊이와 우아함을 불어넣었다. “떡을 꿈에서, 꺾어 엮어 만든 풀고사리 베개.” 어느 날 아침, 바쇼는 꿈에서 떡을 먹다 깨어난다. 일본 풍습에 풀고사리에 얹힌 떡을 먹는 때는 봄인데 고사리 줄기로 베개를 엮는 시기는 가을이다. 바쇼는 열일곱 자 짧은 시에 나그네가 돼 고향을 그리는 애절한 심정을 압축했다. 이 시에는 봄과 가을 시간 변화가 들어 있고, 고향과 들녘의 공간 이동이 담겼으며, 배부름과 굶주림의 차이가 반영되고, 따스한 집과 차디찬 객지라는 심정의 온도 차도 담겨 있다. 둘 사이 간격이 멀기에 그리움은 더욱 절절하다. 이처럼 겹겹이 쌓인 마음을 풀어헤칠 수 있어야 시속의 변화(俗) 속에 고상한 정신(雅)을 담아낸 하이쿠를 즐길 수 있다. 우키요가 이룩한 에도 미학의 절정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조닌들이 더욱 열광한 것은 속됨을 있는 그대로 표출한 이하라 사이카쿠의 세계였다. 우키요조시(浮世草子)의 창시자 사이카쿠는 ‘호색한 일대기(好色一代男)’에서 유교적 충절과 도덕주의를 퍼뜨리려 했던 막부의 세계를 조롱하면서 현세적·향락적 삶을 즐기는 인간을 펼쳐낸다. “가짜로 자는 척하는 연애 옷은 미망인이 입는 옷에 모자, 염주 등을 넣어 만든 옷이다. 이 옷을 옆방 방바닥 아래 빈 곳에 넣어두고 미망인과 입을 맞춘 후, 미리 남자를 들여보내 그 옷을 입고 눕게 해 아랫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밀회하는 것이다. 이런 비밀 수단은 여럿이 있다.” 이 같은 작품에는 인간 욕망을 해방한 연애담이 끝없이 이어진다. 사이카쿠는 “사람은 요물”이라고 말한다. 다채롭고 변덕이 심한 사람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뒤를 이어받은 에지마 기세키는 ‘요즘 여자들 기질(世間娘氣質)’에서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불성실’하게 살면서 솔직하게 욕망을 실현하는 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모든 여성은 바람기 있는 존재”로 “매일 연극 구경을 하고, 찻집에 부탁해 마음에 드는 남자 배우에게 편지를 쓴다.” 심지어 그들은 “하급 창녀가 돼 배우와 함께할 수 있음을 기뻐하며, ‘처음부터 이런 신분이었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한다.” 신분보다 욕망, 여성들도 해방을 갈망했다.

이것이 에도의 내면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양식인 우키요에는 이 소설들에 들어가는 삽화에서 시작했다. 채색 판화 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키요에는 유녀(遊女), 스모선수, 가부키 배우의 초상을 담은 홍보물로, 시정 풍경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린 풍경화로 제작돼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우키요에서 조닌은 미야비를 거부한 채 쾌락에 탐닉하는 관음적 주체로 나타난다. 이는 넘치는 부에도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없었던 조닌들이 중세 봉건 질서에 대한 전면적 거부를 드러낸 것이자 정신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욕망에 중독된 그 세계관의 한계를 보여준다.

메이지유신 이후, 막부는 해체되고 에도는 사라져 ‘동쪽의 수도’ 도쿄가 됐다. 무사가 없어진 세계에서 시대의 주인으로 떠오른 조닌들은 속됨의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수백 년 평화를 이어가는 대신, 탐욕에 사로잡혀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대의 일본은 조닌의 욕망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우키요에를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물어본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 : 에도시대 일본의 정치체제는 막부와 260군데 번으로 이뤄진 막번 체제였다. 막부는 에도성 주변에 다이묘들의 저택을 지어주고, 그 처자를 인질로 잡아둔 후, 그들에게 정기적으로 막부를 오가도록 했다. 두 곳의 저택을 유지하고 체면을 차려 에도를 오가는 행렬을 갖추려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됐고, 이는 장기적으로 다이묘들을 몰락시켰다.

자포니즘(Japonism) : 우키요에는 프랑스 인상파 미술에 큰 영향을 줬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일본 상인들은 대량 인쇄된 우키요에로 도자기를 포장했다. 에도의 일상을 그려낸 호쿠사이의 목판화 연작 ‘만화(漫畵)’가 그 안에 있었다. 판화가 브라크몽이 그 독특함에 반해 모은 후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감상한 것이 자포니즘 열풍을 일으켰다. 인상파는 호쿠사이의 후지산 연작에서 빛이 넘쳐나는 새로운 풍경을 발견했고, 에도의 거리 풍경과 유녀들 초상에서 일상의 미(美)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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