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호적 정정' 기다렸는데..제주4·3 유족들 또 부글

허호준 2021. 9. 2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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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특별법·시행령 후속조치 3대 쟁점 진단
호적 정정
- 희생자만 가능 유족은 제외돼 논란
특별재심 - 수형인선별재심 기류에 유족회 반발
위자료 - 이달 초 관련용역 마무리, 액수는 미정
지난 4월3일 제73주기 추념식이 열린 제주4·3평화공원에서 한 유족이 간단한 제물을 준비하고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 앞에서 제례를 지내고 있다. 지난 2월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됐지만 유족들에게 여전히 봄날은 오지 않았다. 허호준 기자

지난 24일 오후 제주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만난 양시영(50) 제주4·3유족회 사무국장은 허탈해했다. “수년 전부터 어머니의 호적을 정정하고 싶었지만 4·3특별법이 개정되면 가능할 것으로 보여 기다렸어요. 지난 2월 4·3특별법이 개정되니까 이제는 하소연할 곳이 생겼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는데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대상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어요.”

양씨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서귀포시 남원읍 집에서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겼고, 한국전쟁 발발 뒤 마포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됐다. 이듬해 유복자로 태어난 어머니 정영순(72)씨는 큰아버지의 딸로 입적됐다. 부모의 혼인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양 국장은 “할머니는 올해 100살입니다. 4·3특별법이 개정되면 호적 정정이 가능할 줄 알고 기다려왔으나 이제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유전자 검사를 하고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해 호적을 바로잡을 계획”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제주도 전체 마을의 53%가 소개되고 134개 마을을 초토화돼 사라지도록 한 4·3은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의 가족관계마저 뒤틀어놓았다. 4·3 때 부모가 몰살되거나 행방불명되면 어린 자식들은 친척 호적에 올라야 했다. 양 국장의 어머니처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살던 부모 또는 어느 한쪽이 희생되면 유복자로 태어난 이들은 친척의 호적에 입적되는 경우도 있었다.

서귀포시 강정동 강아무개(73)씨는 아버지가 혼인신고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숨지자 작은아버지 딸로 입적됐다. 제주시 화북동 안아무개(74)씨는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4·3 때 희생되자 큰할아버지 딸로 입적됐다.

지난 3월5일 제주4·3특별법이 개정된 뒤 이를 환영하는 도민보고대회가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열려 만세를 부르고 있다. 제주도 제공

유족들은 지난 2월 개정된 4·3특별법(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6월 시행된 시행령이 뒤틀린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개정된 제주4·3특별법 제12조(가족관계등록부의 작성)에는 4·3으로 인해 가족관계등록부가 작성돼 있지 않거나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경우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이를 작성 또는 정정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시행령에는 가족관계등록부 작성·정정 신청 대상을 4·3중앙위원회에서 결정된 ‘희생자’로 한정했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사망기록이 없는 희생자의 가족관계등록부 사망기록 작성이나 사망기록이 있는 희생자의 사망일시나 사망장소를 정정할 수 있지만, 유족은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양 국장은 “오는 10월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유족들의 ‘호적 불일치’ 사례를 조사해 행정안전부 등에 실태를 알릴 계획이다. 이 조항이 보완입법을 통해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4·3유족회 쪽은 “특별법 개정에도 호적 정정이 불가능한 경우에 대한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 현재 20~30건이 접수됐지만 꽤 늘어날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4·3특별법의 또 다른 핵심인 특별재심과 배·보상 성격의 위자료 지급도 난항이 예상된다.

지난해와 올해 수형 생존자와 행방불명된 이들의 유족이 제기한 재심 청구소송에서 350명 이상이 무죄 판결을 받아낸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개정된 4·3특별법에는 ‘특별재심’ 조항을 신설해 4·3중앙위원회가 법무부에 직권재심 청구를 권고할 수 있고, 법무부는 권고 취지에 따라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작성된 군법회의 명령서에 나온 희생자 2530명 가운데 무연고자 등 600여명은 4·3 희생자로 결정되지 않은 상황인데, 법무부가 이들은 직권재심 청구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선별 재심 방안이 추진된다면 이는 4·3특별법 개정 취지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4·3유족회도 최근 성명을 내어 “법무부가 졸렬한 법 해석으로 직권재심 청구 대상자를 일괄이 아닌 제한적으로 선별하겠다는 것은 입법 취지와 목적을 무시하는 것으로 배신감에 분개할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에 젖은 제주시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방불명인 표석 공간. 허호준 기자

배·보상 성격의 위자료 지급은 더 큰 폭발력을 갖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전문 연구기관에 맡겨 실시한 관련 용역은 이달 초 마무리됐다. 추석 이전에 제주에서 열기로 했던 설명회는 늦춰진 것으로 알려졌다. 행안부는 지난달 초 제주에서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 설명회를 열어 당시 나이·직업·성별 등에 따른 차등지급 방안 등을 꺼냈다가 유족들의 강한 반발을 샀다. 지난 2007년 울산보도연맹 희생자 유족들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억3200만원을, 제주지역의 예비검속 희생자들도 같은 액수를 받은 바 있다. 총리실 산하 제주4·3중앙위원회가 결정한 희생자는 지난 8월 말 기준 1만4533명에 이른다.

도 관계자는 “73년 동안 아픔을 갖고 살아온 유족들의 답답함을 해소해야 한다. 보완입법 과정에서라도 유족들의 입장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유족들은 제주시 관덕정 앞에서 ‘제주4·3특별법 통과 기념 도민보고대회’를 여는 등 4·3특별법 개정을 적극 환영했다. 올해 4·3 추모식의 슬로건도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어요)였다. 동백꽃은 활짝 피었을까.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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