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크박스 뮤지컬' 인기 이유 있었네

정혁준 2021. 9. 2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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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넣으면 노래 나오는 기계
'주크박스' 이름 따온 뮤지컬 장르
원조는 아바 곡 엮은 '맘마미아!'
노래 익숙해 관객층 넓히지만
스토리와 부조화 땐 몰입 방해
"K콘텐츠 새로운 대안" 기대도
뮤지컬 <사랑했어요> 공연 사진. 호박덩쿨 제공

2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가객 김현식의 노래를 무대에서 고스란히 풀어낸 주크박스 뮤지컬 <사랑했어요>가 추석 연휴에도 공연을 이어갔다. 구동욱(58·자영업)씨는 아내와 딸, 아들과 함께 뮤지컬을 봤다. 구씨는 “5년 만에 보는 뮤지컬”이라며 “가수 김현식 노래가 등장한다고 해서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김현식 노래를 좋아해 뮤지컬에서 노래를 듣고 싶었고, 뮤지컬을 보며 젊었을 때의 추억도 떠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동전을 넣으면 유행하는 노래를 들려주는 기계인 주크박스에서 이름을 따왔다.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노래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공연하는 뮤지컬을 말한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원조 격은 스웨덴 팝그룹 아바의 히트곡을 엮은 <맘마미아!>다. 1999년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뒤 세계 50여개 나라에서 공연될 정도로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맘마미아!>는 관객이 좋아하고 익숙한 가수의 노래를 새로 창작한 이야기에 맞춰 넣는 방식으로 서사를 진행했다. 이후 많은 주크박스 뮤지컬이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다.

뮤지컬 <맘마미아!> 공연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이런 주크박스 뮤지컬이 올 하반기에 국내외에서 다시 인기다. 26일(현지시각) 열린 2020 토니상 시상식 ‘베스트 뮤지컬’(작품상) 후보에 오른 세 작품은 모두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 캐나다 싱어송라이터 얼래니스 모리셋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 <재기드 리틀 필>은 15개 부문, 여러 팝송을 들을 수 있는 뮤지컬 <물랭루주>는 14개 부문, 티나 터너의 일생을 다룬 <티나>는 12개 부문의 후보가 됐다. 토니상 작품상에 오른 후보 모두가 주크박스 뮤지컬이란 점은 이례적인 것으로, 그만큼 주크박스 뮤지컬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12월엔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음악과 생애를 다룬 뮤지컬 <엠제이>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다. 퓰리처상 극본상을 두차례 받은 린 노티지가 극본을 썼다. <엠제이>는 생전 브로드웨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마이클 잭슨의 곡을 뮤지컬 형식의 드라마와 함께 들을 수 있다. 씨제이이엔엠(CJ ENM)이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초연 뒤 국내에서 선보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크박스 뮤지컬이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연가> <사랑했어요>에 이어 신중현의 노래로 만든 <미인>이 막을 올렸다.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100년의 한국 대중가요로 펼쳐 보이는 <백만송이의 사랑>이 요즘 공연계의 대세로 불리는 고선웅 연출의 손을 거쳐 11월께 선보인다. 이수만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 총괄프로듀서는 지난 7월 대구에서 열린 세계문화산업포럼에서 “10년 가까이 준비하고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 케이(K)팝 뮤지컬을 내년에 공개할 예정으로, 빠르면 올해 말 대구에서 처음 선보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외 얼터너티브 록밴드 플레이밍 립스의 앨범을 바탕으로 한 <요시미 배틀 더 핑크로봇>, 브릿팝 밴드 리버틴스 노래를 엮은 뮤지컬 <보이스 인 더 밴드>도 준비 중이다.

이영훈 작곡가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 <광화문연가> 공연 사진. 씨제이이엔엠(CJ ENM) 제공

이처럼 국내외에서 주크박스 뮤지컬이 인기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개로 분석된다. 먼저 레트로(복고) 바람이다. 힘들 때일수록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을 소환하는 경향이 커진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재가 그렇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주크박스 뮤지컬은 전세계의 레트로 열풍과 맞물려 인기를 끌고 있다. 젊은 시절 잘나갔던 가수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추억을 떠올릴 수 있기에 인기다. 공연장에 잘 가지 않는 사람을 공연장으로 찾아가게 만든다”고 했다.

뮤지컬을 처음 보는 관객에게 주크박스 뮤지컬은 진입장벽이 낮다. 익숙한 노래와 음악이 흘러나오기에 처음 접하는 장르라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 두세시간을 공연장에서 잘 모르는 노래를 들으며 앉아 있는 건 고역이다. 그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 뮤지컬을 처음 보는 사람이 주크박스 뮤지컬을 많이 선택한다.

뮤지션들의 극적인 삶 역시 관객 발길을 끌어모으는 이유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는 “뮤지션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인 경우가 많다. 뮤지션들은 도전하고, 성공하고, 추락하고, 좌절해가며 드라마틱한 삶을 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뮤지션들이 만든 노래와 함께 그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팬이 많기에 주크박스 뮤지컬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했다.

공연 제작자에게도 주크박스 뮤지컬은 매력적이다. 작품을 개발하는 데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데 검증된 노래로 뮤지컬을 만들면 투자 리스크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마케팅에도 도움이 된다. 이미 히트한 노래는 뮤지컬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의 눈길을 끌 만하다.

김광석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 <그날들> 공연 사진.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외국에서 들어오는 라이선스 뮤지컬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은 한국적인 정서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 역시 차별화 포인트다. <사랑했어요>를 제작한 신병철 호박덩쿨 총괄프로듀서는 “<사랑했어요>에는 김현식 음악만 담고 있는 게 아니다. 남북 분단이라는 우리나라만의 비극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라이선스 뮤지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국적인 정서다. 뮤지션의 노래와 함께 그런 한국적인 정서를 느끼기 위해 관객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관객 외연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현재 뮤지컬의 주 관객층은 20~30대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관객을 50~60대로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업계 관계자는 “주크박스 뮤지컬을 찾는 관객은 자신이 젊었을 때 좋아했던 노래를 나이 들어 뮤지컬로 듣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40~70대가 남편, 아내, 가족과 함께 많이 찾는다”고 했다.

제작자들도 주크박스 뮤지컬을 제작할 때 이를 반영한다. <광화문연가> 안무를 맡았던 서병구 안무감독은 “주크박스 뮤지컬은 라이선스 뮤지컬과 달리 우리나라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좀 더 안무에 중점을 둔다”며 “<광화문연가>의 경우 1980~90년대 당시 유행한 춤을 활용한 복고풍 댄스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주크박스 뮤지컬 전성시대라 할 만큼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지만, 이를 향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이미 히트한 노래로 스토리를 만들다 보니 짜임새가 헐거워 허술한 극 전개로 비판받기도 한다. 스토리에 맞춰 만들어진 노래를 끼워 넣다 보니, 스토리와 노래가 맞물려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작품 스토리와 어울리지 않는 히트곡을 포함하려고 필요 없는 장면이 들어가 몰입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원곡을 스토리에 맞게 각색해야 하는데, 원곡 느낌을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점이 되기도 한다.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거나 망쳐놓았다는 비판도 종종 나온다.

토니상에 1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주크박스 뮤지컬 <물랭루즈>. 토니상 누리집 갈무리

이 때문에 주크박스 뮤지컬을 흥행 보증수표로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다. 몇몇 작품을 빼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업계 관계자는 “많은 뮤지컬이 스토리를 먼저 쓰고 이에 맞게 노래를 만드는데 주크박스 뮤지컬은 노래에 맞는 스토리를 짜야 해 제작 난도가 높은 편”이라며 “스토리와 노래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없는 경우 관객에게 외면을 받는다”고 말했다.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지혜원 객원교수는 “사실 국내외에서 주크박스 뮤지컬 가운데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다. 인기 있는 아티스트와 그들이 만든 노래로 뮤지컬을 만들더라도 서사 속에 잘 담아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지 교수는 “주크박스 뮤지컬은 수십년 전 감성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뮤지컬 주 팬층인 20~30대가 이런 정서를 잘 몰라 외면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런 비판에도 주크박스 뮤지컬은 국내 창작 뮤지컬을 다양화하고 뮤지컬 팬층을 두텁게 하고 있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변화 발전해야 할까? 한류 콘텐츠와 케이팝의 성공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주크박스 뮤지컬은 한류의 효과적인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렇다.

신병철 총괄프로듀서는 “최근 선보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디피>(D.P.)나 <오징어 게임>은 한국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콘텐츠지만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국제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 들어가 있는 주크박스 뮤지컬은 관객의 관심과 자본 투입이 병행된다면 세계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다.

지 교수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 등 케이팝은 이미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한국 드라마와 영화 콘텐츠도 아카데미와 넷플릭스에서 인정받고 있다. 케이팝에 한국적인 콘텐츠를 접목하면 주크박스 뮤지컬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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