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종전선언 제안, 가볍지 않다

양홍주 입력 2021. 9. 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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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를 불과 7개월여 앞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비대면 연설로 충분했음에도 굳이 유엔으로 향했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종전선언 제안 후 미 정부가 마치 북의 반응을 감안한 듯 "적대 의도가 없다"고 밝힌 대목은 지난해 동일한 제안 때 미 조야에서 "한미동맹 폐기의 구실이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상황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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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뉴스1

임기를 불과 7개월여 앞둔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비대면 연설로 충분했음에도 굳이 유엔으로 향했고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가련하다" "달나라 대통령이다" 등 비난이 예상됐을 법한데도, 미사일 시험발사를 재개하고 핵시설을 가동한 북을 향해 2차 북미정상회담 후 현실성이 옅어진 종전선언 카드를 재차 내밀었다.

문 대통령이 그나마 성과를 인정받았던 외교·안보 분야에서 막판 진전을 노린 성급한 급발진일까. 다음 정부에도 남북평화 로드맵을 온전히 전하겠다는 순진함의 발로일까. 이래저래 갑작스러운 종전선언 제안에 대해 "통일의 첫걸음"이라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만 들려오진 않는다.

하지만 이번 제안은 문재인 정부의 '환상'이 일으킨 몸부림으로 넘겨버릴 만큼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종전선언 주체 4자의 처지와 정세 흐름을 살펴보면, 남북관계는 이번 제안의 진전 여부에 따라 극명히 달라진 내일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2018년 남북정상이 천지에 오르며 정점에 닿았던 남북관계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좌초 이후 내리막으로 치달았다. 그동안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날아갔고, 우리 공무원이 피살됐다. '도발'과 '무례'의 격한 메시지가 오가며 경색은 더해졌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그만큼 남북대화의 모멘텀은 어느 때보다 무르익었다. 코로나 위기가 엄습하면서 제재의 사슬을 느슨히해야 할 김정은 정권의 다급함은 만수위에 올랐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북한은 전시 비축미마저 비우고 있을 정도다. 당장 김여정 부부장의 "좋은 제안이다"라는 발언과 정상회담 언급은 '적대 철회'라는 단서가 붙긴했지만 북이 이번 종전선언 제안을 무겁게 가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소한 우리를 당장 "오지랖 넓은 중재자"로 몰아붙일 공산은 크지 않다.

특히 주목할 곳은 중국이다. 종전선언 주체로 처음 지목된 중국은 아직 이렇다 할 관련 논평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짐짓 자신들이 한반도 정세변화에 한몫할 기회가 주어지면서 고무됐을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원했던 남북미중 구도가 그려지는 만큼, 앞서 방한한 왕이 외교부장을 통해 우리와 종전선언 제안의 교감을 이뤘음이 분명하다. 지난여름 심심치 않게 들려온 김정은 위원장의 방중설이 머지 않아 실현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바이든 정부의 시그널도 부정적이지 않다. 동맹을 강화하고 외교·안보 자산을 중국으로 집중 겨냥해온 미국은 한반도 긴장완화의 기회를 무시할 수 없다. 종전선언 제안 후 미 정부가 마치 북의 반응을 감안한 듯 "적대 의도가 없다"고 밝힌 대목은 지난해 동일한 제안 때 미 조야에서 "한미동맹 폐기의 구실이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상황과 비교된다. 미중관계의 걸림돌이었던 멍완저우 화웨이 부회장 석방 또한 종전선언 가도의 그린라이트이다.

물론 지금까지 북한이 보여왔듯 대화와 도발을 오가는 롤러코스터식 남북관계가 재현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한미동맹을 대외정책 1순위로 못 박지 않는 바이든 정부가 북한을 협상 테이블에 붙잡아둘 당근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문재인 정부만의 숙원이 아닌 종전선언, 나아가 남북평화협정의 돌파구가 희미하게나마 빛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정쟁이나 일회성 이벤트의 소재로 소비되어 버리기엔 종전선언 제안의 함의가 너무 값지다.

양홍주 디지털기획부문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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