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세금 없으면 예술을 못하나

정상혁 기자 2021. 9. 27. 03: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술이 대중을 향한 선물일 수 있음을 ‘포장된 개선문’은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 대지미술가 크리스토(1935~2020)의 대형 기획으로, 프랑스 파리 개선문 전체를 2만5000㎡의 은빛 천으로 싸맨 설치작품이다. 지난 18일 공개돼 10월 3일까지 한시적으로 일대의 풍경을 완전히 뒤바꾸는 미적 실험에 제작비 약 190억원이 투입됐는데, 비용 전액은 크리스토 유족 측이 작품 판매 등으로 마련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실로 거대한 이 공공 미술 앞에서 “납세자의 돈은 한푼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공공(公共)의 이름을 내건 예술은 ‘돈줄’에 가깝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에 무려 1000억원을 투입했다. 역대 최대 규모지만, 국민적 이목을 끄는 작품은 찾을 수 없다. 미추(美醜)에 대한 고심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한 생계 지원과 일자리 창출에 더 큰 방점이 찍힌 탓이다. 흉물 소리가 나오고, 인테리어 도장만도 못한 벽화(壁畵) 따위가 되레 동네를 슬럼화시켰다. 감동은커녕 짜증만 부르는 것을 공공 예술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공공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술에 정당한 결과를 요구하는 것이 비윤리적 절차로 간주되고, 묻지 마 지원이야말로 당연한 선(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예술은 이해타산과 평가가 쉽지 않다는 논리도 논리거니와, 혜택 배제 시 ‘블랙리스트’ 운운하는 목소리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부작용은 예술의 탈을 쓴 세금 약탈이다. ‘꾼’들이 암약하는 것이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지하철 9호선에 공공 미술품 명목으로 설치된 38점의 조각 중 7점이 한 작가의 것이었고, 유명 작가도 아닌데 작품 매입가(價)가 점당 1억원에 달했다. 당시 취재를 진행하다 9호선 한 역사(驛舍)에 놓인 철제 조각에 대해 묻자 역무원이 되물었다. “그게 미술품이었어요?”

국민적 향유와 예술 육성을 위해 세금은 적극 투입돼야 한다. 동시에 공공재적 역할 수행을 위한 깐깐한 기준 역시 수반돼야 한다. 어떤 예술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겠으나, 그럼에도 선정 및 안배가 최소한의 상식과 형평성에는 부합해야 한다. 세금은 공돈이 아니라 국민의 고혈인 까닭이다. 한국의 예술가 문준용(39)씨는 대통령 자제임에도 자제력을 잃고 공공 영역에서 유독 활개를 친다. 비판의 본질도 읽지 못하고 “원래 모든 작품은 세금으로 사는 것”이라는 소리나 하고 있다. 부친이 행정부 수반인 그는 공공기관에서만 지원금 명목으로 지난 1년 간 약 2억원에 달하는 돈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이란 게 나랏돈 없이는 안된다는 초라한 자의식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작업을 크리스토는 먼 나라에서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빙자해 자행되는 숱한 기만 앞에 개선장군처럼 우뚝 서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