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을 위한 연극.. 사치인가, 고독인가

박돈규 기자 2021. 9. 27.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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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리뷰] '코오피와 최면약'
1인을 위한 연극 '코오피와 최면약'. 관객(왼쪽)은 혼자 VR 고글을 쓰고 가상현실로 들어간다. 오른쪽 여인은 가상현실에만 존재하는 헛것이다. /국립극단

입구는 극장에서 1.1km나 떨어져 있었다. 지난 24일 저녁 회현역 앞 서울로7017안내소. 이날 개막한 ‘코오피와 최면약’(연출 서현석)은 이 지점에서 30분마다 한 명씩 관객이 출발했다. 1930년대 미쓰코시 백화점(현재 신세계 명동점)부터 경성역(서울역)까지, 이상(1910~1937) 소설 ‘날개’에 묘사된 길을 따라 걷고 백성희장민호극장에 도착해 VR(가상현실)로 들어가는 형식. 다른 관객과 만나지 않기 때문에 ‘1인을 위한 연극’이라고 국립극단은 홍보했다.

출발점에서 휴대전화로 QR코드를 찍자 이어폰으로 “나는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라는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날개’ 속 주인공의 독백이었다. 들으면서 극장으로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멈추는 장소가 몇 군데 있었는데, 수국전망대에서는 VR 고글을 써야 했다. 한복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 보였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면서 잠깐 현기증이 일었다. 다시 극장까지 걷는 동안엔 “1945년 최초의 핵폭탄 실험” “1973년 세계무역센터 개장” “2007년 구글 거리뷰 서비스 시작” 같은 연대기를 들려줬다.

연출가 서현석은 '코오피와 최면약'에 대해 "코오피는 자각이나 각성, 최면약은 무기력을 상징한다"며 "1910년에 태어난 이상이나 지금 우리나 병주고 약주는 사회의 폭력에 노출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립극단

‘날개’의 주인공은 경성역에 있던 티룸(다방)에서 자주 코오피(커피)를 마셨다.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VR 고글을 쓰자 동그란 식탁과 의자, 그 티룸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대목부터는 제작진이 설계한 가상현실로 들어온 셈인데, 어느덧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여성 관객이라면 다를 수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다가와 천으로 내 눈을 가렸고, 기절한 나를 사내들이 들고 나가는 게 보였다. 정신이 육신에서 분리되는 기분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내 앞에서 커피를 따랐다. 덜컹덜컹 기차 소리가 커지면서 그 진동이 찻잔을 흔들었다. 아까 본 서울로 풍경이 백일몽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번엔 그 여인이 식탁에 카드를 깔았다. 아무렇게나 한 장을 뒤집는데 그 카드는 곧장 뼈다귀로 변했다. 서울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잠깐 보였다. 여인이 다시 카드를 몇 장 뒤집는데 뼈다귀, 또 뼈다귀였다. 주사위를 던져 어떤 숫자가 나오든 넌 죽을 거야, 라는 음산한 예언 같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인이 혀를 내밀더니 메롱~ 했다. 멱살을 잡고 싶지만 아서라 이건 가상현실이다. 안내원의 지시대로 일어나 네댓 걸음 걷자 빨간 방이 펼쳐졌다. 복판에 놓인 식탁과 의자를 내 몸이 투명인간처럼 가로질렀다. 가상공간에서 헤엄치는 재미는 있지만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찝찝했다.

관객은 몸으로 접속하며 작품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 배우의 컨디션을 핑계 댈 수 없는 VR 부분은 누구에게나 균일하지만 극장까지 걸으며 만나는 사람과 풍경은 제각각이다. 1인을 위한 연극은 사치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공연을 보고 감상을 나눌 관객이 없다는 게 주는 고립감(형벌)도 상당했다. 공연은 10월 3일까지. 평일에 16명, 주말엔 22명까지 볼 수 있다. 모두 168명이 따로 경험하는 혼자만의 세계. 코로나 시대라서 더 흥미로운 형식 실험이었다.

서울로7017을 따라 극장까지 1km 넘게 걷는 이동형 공연 '코오피와 최면약'.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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