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카디건을 걸친 의자

강우근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 입력 2021. 9. 2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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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다 보면 공터에 놓여 있는 의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버린 것 같은 그 의자에는 폐기물 스티커도 붙어 있지 않고,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수거되지 않는다. 그 의자에는 노인들이 모여서 떠들기도 하고, 산책을 하던 몇몇 사람이 앉아 있다가 가곤 한다. 새벽이 되면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의자에 웅크려 잠을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착지하는 쉼터가 될 수도 있고···. 안장에 과자 부스러기라도 놓여 있다면 개미에게는 먹이를 구하기 위한 등산로가 의자에서 펼쳐질 것이다. 이렇게 의자는 바라보는 대상에 따라서 다르게 변해간다.

만약에 같은 사이즈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백 개의 의자가 가구 창고에서 판매되어 고객한테 도착한다면 의자들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낡아갈 것이다. 나처럼 커피를 자주 마시는 사람의 의자에는 실수로 쏟은 커피 얼룩이 묻을지도 모른다. 개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한창 이갈이 중인 개로 인해 의자 다리에 이빨 자국이 남을 수도 있고,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는 몇 개의 털이 의자 방석에 달라붙을 수도 있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캐릭터 스티커가 의자에 붙어 있을 수도 있겠지.

살아가면서 우리 각자의 몸에 남겨진 자국이 다른 것처럼, 의자들도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가진 채로 낡아갈 것이다. 오래 써온 의자일수록 그 의자에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보낸 일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살아가듯이, 백 개 의자 중에서 나로 인해서 단 하나의 무늬를 가지게 된 의자가 있다.

어느 의자보다도 내가 써오던 의자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의자에 앉는 것은 의자와의 포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가끔 내 몸을 닦듯이 의자를 구석구석 닦는다.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의자는 가을을 맞이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각자가 써오던 의자를 한번 바라보자. 의자는 우리가 어떤 일상을 보내왔는지 말해주고 있다.

강우근 시인.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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