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메르켈 사랑 “이젠 EU위해 일해주오”
25일(현지 시각) 독일 베를린 시내를 가로지르는 슈프레강 주변. 산책을 하던 40대 여성 샤를로테는 “이번 총선에 나온 총리 후보 중엔 메르켈만 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한숨만 나온다”고 했다. 옆에 있던 50대 남편 클라우스는 “(메르켈이) 아직 60대니까 한 번은 더 해도 좋을 텐데…”라고 했다.
26일 총선을 하루 앞둔 이날 베를린 시민들은 이번 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떠나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벌써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번 총선에선 16년간 총리직을 수행하고 은퇴하는 메르켈의 후계자가 탄생한다. 하지만 독일 시민들의 반응에선 새 지도자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무티(Mutti·엄마) 리더십’으로 독일과 유럽을 이끈 메르켈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만난 토르스텐 피퍼(52)씨는 “나는 항상 녹색당과 사민당에만 투표해온 중도좌파지만 메르켈이 훌륭한 총리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고 했다. “비리나 부패 같은 뒷말이 전혀 없는 깨끗한 리더였잖아요. 과학자답게 일처리는 항상 정확했고요. 대외적으로 독일의 위상도 높아졌죠. 무엇보다 메르켈은 사람을 다룰 줄 알아요.”
메르켈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일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매달 정치인 만족도 조사를 하는 공영방송 ARD에 따르면, 이달 메르켈에 대해 ‘만족한다’는 응답은 64%로 여야 모든 정치인을 눌렀다. 여당인 기민·기사당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에 대한 만족도는 20%에 그쳤다. ARD 조사에서 메르켈에 대한 만족도는 16년간 한 번도 40%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다. 꾸준히 60%대 안팎을 유지했다.
메르켈은 유럽의 ‘원톱’ 국가로 독일의 번영을 이끌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GDP(국내총생산) 비율은 메르켈이 취임한 2005년 100대77에서 지난해 100대68로 격차가 벌어졌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19년 독일의 실업률은 3.1%로 사실상 완전고용을 달성했다. 같은 해 프랑스는 8.4%였다.
독일과 유럽인들은 메르켈이 독일 총리 은퇴 후에도 유럽을 위해 뭔가 일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유럽 외교문제평의회(ECFR)가 최근 EU 회원 12국에서 ‘만약 EU 대통령직이 있다면 누구를 뽑겠느냐’는 설문을 했더니 41%가 메르켈이라고 응답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라는 응답은 14%에 그쳤다.
메르켈은 글로벌 금융 위기와 남유럽 재정 위기를 이겨내는 데 앞장서며 유로존(유로화 쓰는 19국)을 지켜냈다. 난민 유입,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과 유럽의 갈등 등 갖가지 난제를 풀어내는 데도 유럽을 대표해 움직였다. EU가 코로나 사태 극복을 위해 채권 발행으로 8000억유로(약 1105조원)의 회복기금을 조성한 것도 메르켈의 결단 덕분에 가능했다. 메르켈은 4명의 미국 대통령, 4명의 프랑스 대통령, 5명의 영국 총리의 맞상대로 지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펴낸 자서전에서 “메르켈은 신뢰할 수 있고 정직하며 지적으로 정확한 사람”이라고 했다.
독일뿐 아니라 영국의 BBC, 프랑스의 르몽드 등 유럽 언론들도 퇴장하는 메르켈을 집중 조명하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독일 장난감회사 헤르만-슈피엘바렌이 최근 500개 한정판으로 만든 메르켈 모양 곰인형은 출시되자마자 완판됐다.
여성, 동독 출신, 이공계 전공자로는 첫 독일 총리가 된 메르켈은 열악한 조건을 딛고 일어서며 입지전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1991년 여성청소년부 장관이 됐을 때 ‘콜걸(kohl’s girl)’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나왔다. 헬무트 콜(1982~1998년 재임) 당시 총리가 여성 배려용으로 입각시켰다는 비아냥이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스스로 리더로서 자질을 입증하며 콜과 함께 역대 최장수 독일 총리로 이름을 남기게 됐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작년까지 10년 연속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다.
메르켈 리더십을 연구한 맷 크버트럽 영국 코번트리대 교수는 “그는 오랫동안 남성 정치인들 간 싸움으로 전개되던 독일 정치판을 정책 토론의 무대로 바꿔놓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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