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폭우·병충해에 빼앗긴 수확의 행복..'우리 탓' 잘 알기에 하느님 원망도 못해요 [기후위기 최전선, n개의 목소리 ③]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국제조정위원 2021. 9. 26. 21: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여성농민

[경향신문]

언제부터였을까요. 폭우나 태풍 등으로 자식 같은 곡식들을 묻게 되면 농민들은 그 원망을 하느님께로 돌렸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을 원망하지도 못합니다. 하느님의 ‘무심’ 때문이 아니라 ‘나의 탓’ ‘우리의 탓’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농사지은 지 30년 된 여성농민입니다. 이만큼 농사를 지었으면 이제는 눈 감고도 지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갈수록 어렵고 힘이 듭니다. 요즘은 ‘언제 나에게 기후재난이 닥쳐도 놀라지 말자’는 이상한 다짐을 제 자신에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언제 기후로 인한 재난이 내 논밭에서 벌어질지 알 수 없을 만큼 불안하기도 한 것이 이 시대의 농민입니다.

‘따뜻해진 봄에 씨앗을 뿌리고 더운 여름을 지나 서늘해지는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한다’라는 평온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왔던 지난 삶이 ‘행복’이었던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이제는 봄에 폭설이 와서 막 올라온 새싹이 얼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일년 내내 가꾸어왔던 곡식들이 하루아침에 물에 잠겨버려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만 농민인 내 삶의 미래가 두려울 뿐입니다.

작년부터는 생강을 키우는 밭에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는 차광막을 설치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폭염에 생강이 견디지를 못하고 썩어버릴 정도의 날씨가 되어버렸습니다. 넓은 밭에 차광막을 설치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중간중간 지지대도 박아야 하고 비바람에 날아갈까 늘 꼼꼼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 자재비용도 많이 들고요.

한반도 기온이 높아질수록 병충해가 굉장히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올해도 기온과 습도가 높다 보니 온갖 벌레가 창궐했습니다. 겨울이 춥지 않다 보니 더 그렇고요. 전에는 없던 벌레와 병이 갈수록 극성이어서 제대로 작물을 수확하려면 예전보다 몇배의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 농사 중에서도 고추가 병충해에 약하다 보니 올해는 특히 고추농사 짓느라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모종값도 못 건질 판이었습니다.

올해는 농사지은 후 처음으로 내 손으로 키운 배추를 가지고 김장을 못하는 해가 될 것 같습니다. 8월 내내 계속되는 비에 제때 배추를 심지 못했습니다. 30년 만에 처음입니다. 다 처음입니다. 이처럼 날씨가 뒤죽박죽인 해도, 이처럼 비가 많은 해도, 이처럼 더운 해도 다 최근 몇년간이 ‘처음’인 일이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농사는 여전히 자연의 힘과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현재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기후라는 거대한 폭풍의 맨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갈수록 빈번해지는 기후재난 속에서 농민들은 삶의 안정성을 보장받고 있지 못합니다.

작년에는 아시다시피 54일간이나 계속됐던 긴 장마에 남아나는 작물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쌀 수확을 예년보다 3분의 1이나 못했지만 정부는 그것이 마치 제 개인 탓인 양 그 책임과 걱정을 나눠 지지 않았습니다. 피해 조사조차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걱정만 하고 있기에는 당장의 생존이 너무나 급박합니다. 바꾸어야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하니 당장 바꾸어야 합니다. 내 삶도, 우리의 삶도, 우리 사회도 나중이 아니라, 다음이 아니라, 천천히가 아니라 지금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지구에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3분의 1이 산업화된 농업과 먹거리 분야에서 나옵니다. 생산 방식의 전환, 글로벌 푸드 시스템을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먹거리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통해 에너지를 줄일 수 있고 온실가스 배출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에 따르면 생태적인 농업을 통해 만들어진 건강한 토양은 배출된 온실가스의 3분의 1을 흡수하고 격리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정부 정책이 이를 지지하고 지원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를 살려왔던 땅에서 농민들이 다시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국제조정위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