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세상]순자의 가을
[경향신문]
가을은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잔인한 계절일 수도 있다.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 나 홀로 가는 길은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창밖엔 눈물짓는/ 나를 닮은 단풍잎 하나/ 아, 가을은 소리 없이 본체만체/ 흘러만 가는데….”
1978년 대학가요제 출연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냈던 가수 심수봉은 이듬해 KBS 라디오 드라마 <여인극장-순자의 가을>의 동명 주제가를 만들어 불렀다. 10·26 때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시련을 겪다가 1980년 박호태 감독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제가를 부르면서 재기했다. ‘순자의 가을’은 이 영화의 주제가로도 쓰이고 그녀의 3집 앨범에도 수록됐다.
그러나 총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이 하필 이순자였다. 이 노래가 만들어질 때 순자라는 이름의 ‘대통령부인’은 존재감도 없었지만, 이유 불문하고 금지곡이 됐다.
결국 노래 제목을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로 고친 뒤 1983년 후배 가수 방미의 6집 앨범 타이틀곡으로 부르면서 크게 히트했다. 이정선이 편곡을 맡고, 심수봉이 코러스와 피아노에 참여했지만 작품자는 엉뚱한 이름으로 표기됐다. 훗날 원곡자인 그녀가 다시 발표했지만 이미 ‘순자의 가을’도, 심수봉도 지워진 뒤였다.
이 가을, 심수봉은 더는 외롭지 않다. KBS가 추석특집으로 방송한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은 국보급 목소리를 가진 싱어송라이터 심수봉의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낸 감동적인 무대였다. 이제는 권력의 이름으로 아티스트를 술자리에 앉히는 전근대적인 구태도 사라진 지 오래다.
오광수 시인·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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