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남북정상회담 논의할 수도"..북미대화 먼저라던 기조 바꿔

이제훈 입력 2021. 9. 26. 19:56 수정 2021. 9. 26. 21: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뉴스분석 l 김여정, 연이틀 긍정 담화
북, 남과 대화로 교착 풀겠단 신호
어게인 2018? 통신선 재개가 시금석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27일 첫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을 넘나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사실상 멈춰선 ‘한반도 정세 시계’가 다시 움직일 조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각) 유엔총회 연설에서 한 ‘종전선언’ 등 잇따른 대북 제안에 북쪽의 반응이 전례 없이 빠르고 뜨겁기 때문이다.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은 25일 밤 <조선중앙통신>에 발표한 ‘담화’에서 “공정성과 서로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유지될 때, 북남 수뇌상봉(정상회담)도 건설적인 논의를 거쳐 보기 좋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조선이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관계 회복과 발전 전망에 대한 건설적 논의를 해볼 용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한 지 하루 만이다. 이는 지난달 1일 ‘남북 직통연락선 복원’(7월27일)에 관한 남쪽의 반응에 “북남 수뇌(정상)회담 문제까지 여론화하고 있던데 나는 때 이른 경솔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며 선을 그었을 때와 견주면 확연히 긍정적인 태도다.

2018년 때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을 포함한 이른바 ‘톱다운’ 접근으로 정세 교착을 돌파하고 싶다는 강한 신호로 읽힌다. 김여정 부부장은 “북남 수뇌상봉” 외에 “의의 있는 종전이 때를 잃지 않고 선언되는 것”과 “북남 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김 부부장은 ‘태도 변화’의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우선 “북남관계를 하루빨리 회복하고 평화적 안정을 이룩하려는 남조선 각계의 분위기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역시 그 같은 바람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 “지금 북과 남이 서로를 트집 잡고 설전하며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남북 모두 관계 회복과 평화적 안정을 바라니 속도감 있게 문제를 풀어가자’는 채근이다.

김 부부장은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자주권에 대한 노골적 무시이고 도전”인 “미국·남조선의 대조선 이중기준”과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해소하려는 “남조선 당국의 움직임이 눈에 띄는 실천으로 나타나기를 바랄 뿐”이라고 강조했다. 대미 설득에 남북이 협력하자며 남쪽에 일종의 ‘도움 요청’을 한 것이다.

이는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뒤 북쪽이 견지해온 ‘북미 관계 먼저, 남북관계 나중’ 기조에서 ‘남북관계 회복을 통한 북미 관계 개선’으로 기조를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대한 방향 전환이다. 이 과정에서 남북이 물밑 교감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북쪽의 ‘방향 전환’의 배경을 정세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으로 나눠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세적으론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의 주체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를 적시해 중국이 움직일 공간을 열고, 지난 22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스냅백을 전제로 한 대북 제재 완화’(약속 위반 때 자동복원을 전제로 한 제재 완화) 검토 필요성을 공개 제안한 사실이 중요하다. 문 대통령과 정 장관이 ‘대북 제재 완화’와 ‘중국 구실론’을 미국과 유엔의 심장부인 뉴욕에서 강조한 건 ‘전략적 결단’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김 부부장의 담화는 이에 대한 호응으로 읽힌다.

아울러 조 바이든 대통령이 “남북 대화와 관여, 협력에 대한 지지”를 한·미 정상 공동성명(5월21일 워싱턴)에 명시한 것은 ‘남북관계 회복을 통한 북미 관계 개선’ 기조의 작동 가능성에 관한 북쪽의 기대를 높였을 수 있다.

구조적으로는 북한 내부 경제 사정이 꼽힌다. ‘인민경제’까지 제재 대상으로 삼은 미국·유엔의 고강도 제재에 더해 지난해 1월 이후 이어진 코로나19 관련 국경 폐쇄 장기화 탓에 경제 침체·하강이 ‘한계선’에 다가서는 상황이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분석이다.

김 부부장의 담화가 ‘빈말’이 아님을 확인할 첫 시금석은 남북 직통연락선의 조기 재가동 여부다. 남북 직통연락선은 정전협정 기념일인 7월27일 단절 413일 만에 복원됐다. 그러나 한·미 연합군사연습을 비난한 ‘김여정 담화’가 발표된 지난달 10일 오후 마감통화 때부터 북쪽이 통화에 응답하지 않아 ‘불통’ 상태다. 남쪽은 지금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통화를 시도한다. 기술적으로는 월요일 아침 ‘개시통화’ 때 북쪽이 전화를 받기만 하면 ‘재가동’될 수 있는 셈이다.

통일부도 26일 ‘김여정 담화’를 “의미 있게 평가”한다며 “우선적으로 남북통신연락선이 신속하게 복원돼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남북 직통연락선이 재가동되면 남북 당국 대화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설치’ 논의 등이 궤도에 오를 수 있다. 북쪽의 태도에 비춰, 조만간 남북 직통연락선이 재가동되는 등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남북 협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종전선언과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김 부부장이, 틀림없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재가’를 미리 얻었을 자신의 ‘담화’를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라는 이례적인 표현을 써가며 여지를 둔 까닭이다.

“재개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 남북 대화를 북미 대화로 이어갈 ‘다리’를 놓는 일이 중요하다. 남북 대화가 북미 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의 문을 열 수 없다.

‘제재 완화’와 ‘의미 있는 비핵화 조처’는 미국과 북한이 모두 먼저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다. 이런 상황에서 백신 협력이 대화를 틀 마중물이 될 수 있다. 북쪽이 고통스러운 국경 폐쇄를 풀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전직 고위 관계자는 “한·미 양국이 적어도 북한 주민 80% 정도를 접종할 4천만회분의 화이자(또는 모더나) 백신을 북쪽에 제공한다면 북미 대화 성사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그는 “북미 대화가 재개되면 북미가 제재 완화와 비핵화 조처를 상호 조율해 실천하는 협상을 벌이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