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강진군의 백운동별서 정원에 끌어들인 아홉 굽이 계곡물, 그 위에 술잔을 띄우다

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2021. 9. 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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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12경 명명..제자 초의선사는 하나하나 그림으로 표현
조선 숙종 때 이담로가 조성한 별서, 그 후 12대가 정성껏 가꿔

(시사저널=김정탁 성균관대 명예교수)

우리나라는 역사가 오래되어 땅마다 얽힌 인간 스토리가 많다. 이것이 곧 인문지리다. 인문지리를 알면 역사가 자연스레 다가오고 문화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인문지리 여행기는 비대면 시대에 활발해진 구석구석 국토 여행에 풍성함과 깊이를 더할 것이다.(편집자주)

문화상품의 값어치는 갈수록 소중하다. 일반상품은 편리함을 추구하는 데 그치지만 문화상품은 우리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일반상품도 문화적 요소를 더해야 좋은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내용 못지않게 디자인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행지도 일종의 문화상품이다. 오감만족을 넘어 뭔가 느껴져야 경쟁력을 지닌 여행지로 거듭날 수 있다. 템플 스테이가 서구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여행지가 감동을 주려면 관심을 끌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장강의 적벽(赤壁)이 초라해도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건 삼국지의 주요 무대여서가 아니겠는가.

지난 8월 중순 백운동별서 안으로 들어가는 기와지붕 대문. 산길 따라 돌장식로가 가지런히 깔려 있다.ⓒ김정탁 제공

오감만족+스토리텔링에 감동을 더하는 인문지리 여행

오감만족과 스토리텔링에 더해 감동이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여행지는 그리 많지 않다. 오감만족이나 스토리텔링만 갖춘 여행지는 일회성 방문으로 충분하지만 여기에 감동까지 더해지면 다시 찾고 싶은 여행지로 탈바꿈한다. 이는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져서가 아닐까? 전남 강진군 월하리에 소재한 백운동별서(白雲洞別墅)가 바로 그런 곳이다.

백운동별서는 월출산 옥판봉 남쪽 기슭의 백운곡 동쪽 산자락에 위치한다. 이곳은 조선 숙종 때 이담로(李聃老)가 조성했다. 그의 둘째 손자 이언길(李彦吉)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12대에 걸쳐 이어지면서 유서 깊은 장소가 되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지만 원형 복원을 위해선 여전히 많은 작업이 요구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완도군 신지도에 있는 이광사(李光師) 유배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복원이 너무 허술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함께 간 일행이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별서란 본집에서 떨어져 나와 인접한 경치 좋은 곳에 은거를 위해 조성된 집이다. 서(墅)는 농막을 뜻하기에 소박한 공간이다. 그래서 별장과는 다르다. 이런 소박한 곳에서 어째서 큰 감동이 느껴질까? 필자의 입을 통하는 것보다 일찍이 이곳을 다녀간 다산의 입을 통해 말하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월출산을 등반하고 이곳에 들른 적이 있다. 큰 감동을 받아서인지 12경으로 구분해 각 경관마다 시를 짓고, 그의 제자 초의선사에게 부탁해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이 시와 그림은 현재 화첩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산이 백운동별서에 들어서면서 마주한 순서대로 경관을 묘사해 보자.

별서 입구에 들어서면 동백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마주한다. 다산이 2경으로 꼽은 산다경(山茶徑)이다. 동백나무(山茶) 숲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徑). 너무나 울창해서 낮에도 빛이 들지 않아 유차성음(油茶成陰), 즉 동백나무(油茶)가 이룬(成) 그늘(陰)이라 부른다.

백운동별서의 대문 안쪽 정경. 가까이 작약꽃이 피었고 저 멀리 정자는 제11경 정선대다.ⓒ강진군청 제공
외부에서 끌어들인 계곡수를 아홉 굽이로 나눠 술잔을 띄워 놀았다는 제5경 유상곡수ⓒ강진군청 제공
백운동별서에서 바라본 월출산 풍경. 정약용은 이 경치를 으뜸으로 쳤다.ⓒ강진군청 제공

암벽 이끼에 계곡의 안개를 머금은 푸르름, 그것이 제6경 창하벽

산다경과 별서 사이에는 계곡이 있는데 별서 서쪽 담장을 끼고 흘러내린 물이 작은 폭포를 이룬다. 여기가 4경으로 꼽은 홍옥폭(紅玉瀑)이다. 흐르는 물이 루비(紅玉) 같은 물방울로 부서져서 떨어지는 폭포라는 뜻이다. 물방울이 루비처럼 보이는 건 단풍나무 빛에 반사되어서다.

홍옥폭 옆에 암벽이 있는데 6경인 창하벽(蒼霞壁)이다. 어째서 창하벽일까? 암벽의 이끼가 계곡의 물기와 안개를 늘 머금어 깊은 푸르름(蒼)을 띠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白雲洞'이란 별서의 이름을 노을빛(霞)으로 새겨 운치를 더한다. 이 벽을 지나면 백운동 대문을 곧 만난다.

대문에 들어서면 별서의 내원이 펼쳐진다. 내원의 공간은 장방형인데 여기가 원래 산비탈이었기에 경사면을 따라 조성되었다. 본채는 위쪽에 위치하는데 백운유거(白雲幽居)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외지고 조용한 곳에 있는 집이란 뜻이다. 이담로의 6세손인 이시헌은 자이당(自怡堂), 즉 저절로(自) 즐거움(怡)을 맛보는 집으로 이름을 고쳤다.

본채에서 한 층 내려간 곳에 서쪽 담장을 끼고 취미선방(翠微禪房)이 자리한다. 햇빛을 받아 푸르게 드러나 보이는 산허리(翠微)의 선실이란 뜻이다. 여기가 9경이다. 계곡 변에 죽정(竹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수소실(守素室), 즉 소박함(素)을 지키는(守) 조그만 방이 이를 대신한다. 지난 8월 백운동별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별서의 동주인 이승현 선생과 수소실 마루에서 술 한잔을 걸쳤는데 여운이 오래갔다. 고즈넉한 공간의 매력에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화계를 내려가면 앞뜰이다. 여기에 계곡의 물을 끌어다 바깥 담장 밑으로 난 도랑을 따라 조성한 유상곡수(流觴曲水)가 있다. 유상곡수란 술잔(觴)을 띄울(流) 수 있는 굽은(曲) 물길(水)이다. 계곡에서 두 차례, 계곡에서 끌어들인 물길이 마당에서 다섯 차례, 마당을 한 바퀴 돌아서 대문 밖 물길을 타고 원래의 계류로 합해지는 과정에서 두 차례 굽어진다. 이렇게 모두 아홉 차례 굽어진다. 여기가 5경이다. 경주의 포석정이 유상곡수로 유명한데 민간 정원으로서 유상곡수 자취가 온전히 보존된 곳은 백운동이 유일하다.

백운동별서를 싸고 도는 계곡물. 물방울이 루비처럼 보인다는 제4경 홍옥폭이다.ⓒ강진군청 제공

제11경 정선대에서 바라본 월출산, 다산이 으뜸으로 삼은 경치

풍류를 즐기는 데 유상곡수는 빼놓을 수 없다. 유상곡수로 가장 유명한 건 중국 절강성(折江省) 소흥(紹興)의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 앞을 흐르는 곡수다. 풍류객들은 여기에 술잔을 돌리면서 술을 마셨다. 그래서 시를 짓는 연회도 자주 열렸다.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대표작 난정서(蘭亭序)도 이런 연유로 쓰였다. 그 후부터 굽어져 흐르는 물길이 유행했는데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도 그중 하나다. 또 주희를 열렬히 받든 송시열도 무이구곡을 본떠 충북 괴산군 화양천에 흐르는 물을 화양구곡이라고 이름 붙였다.

동쪽 담장 밖은 운당원(篔蓎園), 즉 껍질이 얇고 마디가 긴 대나무(篔蓎) 숲 정원이다. 여기가 12경이다. 넓게 조성됐기 때문인지 초의선사는 그의 《백운동도》에서 이 대나무 밭을 특별히 강조해 그렸다. 이 대나무 밭에서 자생하는 차나무에서 유명한 백운옥판차가 생산된다. 집 둘레와 비탈로 오르는 언덕이 백매오(百梅塢), 즉 백 그루 매화로 구성된 오목한 땅(塢)으로 3경에 해당한다. 현재는 두 그루 매화나무만 남아있어 지난날 성대한 광경만 희미하게 떠올릴 뿐이다.

집 안에서 남쪽으로 창하벽을 바라보면 정자가 있는데 정선대(停仙臺)다. 신선(仙)이 머무르는(停) 돈대라는 뜻이다. 11경. 정선대에 이르려면 붉은 소나무(貞蕤) 군락이 있는 산등성이(岡)를 지나야 하는데 여기가 정유강(貞蕤岡)으로 7경에 해당한다. 정선대 남쪽 창하벽의 꺾인 북면에는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어 풍단(楓壇)이라 부르는 10경을 연출한다.

정선대에서 북쪽으로 월출산을 바라보면 옥판봉의 장관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우거진 나무들이 커튼 역할을 하기에 그 사이로 보이는 옥판봉 모습은 일품이다. 다산이 어째서 이 경치를 으뜸으로 삼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옥판봉 위에 보름달이 뜨면 세상의 밤하늘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멋질 수 있을까. 그래서 여기가 월출산(月出山), 즉 달이 뜨는 산이지 않은가.

(백운동별서를 방문한 사람들과 얽힌 스토리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김정탁은 누구

커뮤니케이션학 전공으로 성균관대에서 30여 년을 교수로 봉직했다. 현재는 은퇴해 노장(老莊)사상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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