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의 공공탐색] 등나무 숲이 된 운동장

한겨레 2021. 9. 2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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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의 세상짓기]

전북 무주군에 있는 무주등나무운동장. 등나무 그늘이 시원한 스탠드를 가졌다. 임형남 그림

노은주·임형남ㅣ가온건축 공동대표전북 무주는 덕유산 등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깊은 곳에 있다. 예전에는 무척 가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통영대전고속도로를 비롯해 주변에 많은 도로가 개설되며 접근이 쉬워진 덕분에 그렇게 깊은 곳이라는 느낌은 없다.

산이 깊으므로 자연이 좋아 여름이면 청량함의 상징인 무주구천동이 떠오르지만 그것 말고도 갈 이유가 또 있다. 10여년 전 세상을 떠난 건축가 정기용이 어깨에 힘을 빼고 편안하게 만든, 공공 건축물들이 볼만할 뿐 아니라 의미도 깊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같이 공공건축과 사회적 건축이 화제가 되고 여기저기서 비가 온 다음 죽순이 솟아오르듯 많이 만들어지는 때에 꼭 가서 보고 공공건축의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할 곳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정기용은 청년 예술인들을 돕기 위해 무주로 갔다. 그곳에서 우연한 기회에 무주군수를 만나게 됐다. 군수는 정기용에게 그 지역의 공공건축을 부탁한다. 덕분에 그는 무주에서 10여년에 걸쳐 많은 작업을 하게 된다. 곤충박물관, 버스정류장, 목욕장이 있는 면사무소 등 다양하고 신선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시설들이 그 덕분에 생겨나게 된다. 그중에 특히 인상적인 것은 등나무 그늘이 시원한 스탠드를 가진 공설운동장이다.

무주의 중심지라 할 무주군청 주변 모양을 보면 무척 재미있다. 남대천이라는 느릿한 하천이 반을 가르며 흘러가고 있고, 그 위로 만들어진 중심가의 생김새가 마치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의 첫 대목에 나오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닮았다. 남대천 위쪽은 군청 등 번화가가 있고 남대천 아래에는 청소년 수련원, 음악당 등 주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시설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 인근에 공설운동장이 있는데 그 이름이 특이하다. ‘무주공설운동장’이 아니라 ‘무주등나무운동장’이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운동장 둘레에도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시멘트로 단을 높여 만들어진 관중석이 있었다. 그 위로 덮개처럼 등나무 덩굴이 무성하게 자랐다. 학교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로 치르는 학급 대항 줄다리기 시합 등에 참여하기 위해 모두 관중석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곤 했다. 물론 방과 후에 늘어지게 누워서 시간을 보내던 장소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그늘 대신 에어컨이 있는 실내를 더 선호하게 되면서 향수 어린 그런 ‘구닥다리’ 시설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며 등나무라는 나무의 존재조차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 무주에 등나무로 덮인 운동장이 있다는 소릴 듣고는 무척 반가웠다.

예전에 삶이 팍팍하던 시절에는 산이란 산은 모두 벌거숭이가 되고 도시에는 집이 모자라 빈틈없이 채우기만 했다. 도시든 시골이든 여백이 부족했는데 요즘 공공건축에 대한 투자가 많아져 여러 사람이 두루 사용할 만한 공간들이 많아지는 건 무척 좋은 일이다.

“그래서 군수는 주민들을 위해 스탠드에 그늘을 만들 요량으로 운동장 주변에 240여 그루의 등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등나무가 너무 빨리 자라서 감당이 되지 않았고 군수는 건축가에게 어떻게 좀 해달라고 부탁을 한 모양이다. 정해놓은 예산도 없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등나무를 위해 건축가 정기용은 60㎜ 파이프로 간결한 거치대를 디자인해주었다. 정기용의 회고를 듣다 보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공공건축이란 별것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세상의 번잡함을 잠시 피할 수 있는 품이 넓은 그늘. 사실 공공의 책무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공 프로젝트는 조금은 익숙하고 편안한 ‘그늘’을 먼저 고민하기보다, 자극적인 그 무엇으로 해당 지역을 명소로 만들고자 하는 홍보 목적의 아이디어를 짜내는 일이 먼저다. 그러기 위해서 그 일을 기획하거나 실행하는 사람은 우선 자료조사를 통한 ‘벤치마킹’을 시작한다. 전세계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열심히 사진 찍고 메모한다. 그리고 홍보자료를 가방 가득히 담아와서는 컴퓨터에 집어넣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마치 비빔밥을 만들듯이 부어넣고 휘휘 젓는다. 그러곤 거창한 홍보가 시작된다.

말이 좋아 ‘벤치마킹’이지, 이곳저곳의 좋은 풍경과 아이디어를 섞어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공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사람들은 짜깁기 대신 다른 곳에는 없는, 이곳에서만 가능한 풍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주민에게 그늘을 제공하기 위해 등나무를 심고 ‘등나무운동장’을 만든 무주군의 ‘공공 마인드’야말로 꼭 벤치마킹해야 할 값진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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