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추억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아들의 고민..'굿바이 레닌' 영화 리뷰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1. 9. 2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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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 ④ 영화 '굿바이 레닌' 리뷰

우리는 때로 부모의 비상식적인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부모 시대 상식은 날이 갈수록 낡아가고, 어느 순간 더 이상 상식으로 성립하지 않게 돼버린다. 자신이 믿었던 가치와 진리가 이제는 세상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 됐음을 부모가 알아채지 못하는 시기가 온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시대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열혈 공산당원이던 어머니는 8개월 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렉스는 엄마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굿바이 레닌'(2003)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를 보호하려는 아들의 이야기다. 동독의 열혈 공산당원이었던 어머니가 천지가 개벽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혹여나 충격을 받을까 봐 아들은 모든 수를 동원해서 진실을 숨긴다. 엄마는 침대에서 진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머무는 방만 통제하면 쇼크를 받는 건 막을 수 있을 듯하다. 아들의 효심은 세상의 변화를 숨길 수 있을까.
"열혈 공산당원 엄마 충격받으면 안 돼"…사회주의 천국 꾸며낸 아들

독일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 사건 중 하나인 베를린 장벽 붕괴를 엄마 크리스틴 커너(카트린 사스)가 모르게 된 건 그 직전에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들 알렉스(다니엘 브륄)가 베를린 장벽 철거를 주장하는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엄마는 현장에서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졸도했다. 무려 8개월 후 깨어난 엄마는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다. 그새 양쪽 독일이 통일 논의를 본격화하며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몸에 큰 무리가 올지 모른다.
남편이 서독으로 망명한 뒤 어머니는 사회주의 운동가로 변신해 인민 생활 개선에 전력을 다한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알렉스는 모든 것을 숨기기로 결정한다. 엄마가 좋아했던 동독산 피클이 품절되자 그 라벨만 구해서 다른 피클 유리병에 붙인다. 엄마 생일엔 돈을 주고 아이들을 섭외해 동독 소년단으로 분장하고 사회주의 찬가를 부르게 한다. 엄마가 뉴스를 보고 싶다고 해서 알렉스는 친구와 함께 가짜뉴스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두 사람이 만든 뉴스에선 자본주의 서독에서 고통받는 민중이 사회주의 동독을 이상향으로 꿈꾸며 우러러본다.
알렉스가 친구와 만든 가짜 뉴스 속에선 서독 사람들이 동독을 부러워하며 우러러본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하지만 바뀌어버린 세상의 모습은 엄마가 머무는 조그마한 방 안에도 밀물처럼 밀려들어 온다. 엄마가 누워서 보는 창밖으로 자본주의 상징인 코카콜라 현수막이 내려온다. 어느덧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한 엄마가 나간 집 밖에는 사회주의적 검소함과 거리가 먼 온갖 호사스러운 상품들이 가득하다. 급기야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의 동상이 헬리콥터로 운반되며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한 광경까지 목도한다.
"네가 엄마에게 하는 짓은 소름 끼쳐"…선의의 거짓말은 선한가

변화의 속도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다. 지금은 창밖으로 코카콜라 현수막이 떨어지는 정도지만 조금만 지나면 온 세상이 상업광고로 물들어버릴 것이다. 거짓으로 세상을 꾸며내는 데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알렉스가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데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선의의 거짓말 역시 선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그를 번뇌하게 한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알렉스의 여자친구는 좀 더 근본적인 부분을 지적한다. 바로 거짓말의 비윤리성이다. 알렉스는 엄마가 걱정한다는 이유로 누나가 버거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히지 못하게 한다. 알렉스는 엄마가 아들의 여자친구를 흡족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녀 아버지가 농아 학교 교사라고 속인다. 남매는 엄마가 평생 모아온 돈이 통일 국가에서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엄마는 알렉스 덕분에 안정을 취할 수 있겠지만, 한순간도 진짜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여자친구는 알렉스가 엄마에게 하는 행위가 "소름 끼친다"고 비난한다.
알렉스의 여자 친구 라라는 그를 진심으로 아껴주지만, 그가 엄마를 사랑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인생은 아름다워"…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부모를 지키기

거짓말에 갈등하긴 알렉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결국 엄마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가짜 사회주의 낙원을 빚는 데 집중한다. 그런 결정의 배경엔 복합적 요인이 존재하겠지만, 엄마 역시 어린 남매를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거짓말을 했다는 깨달음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서독으로 망명한 뒤 홀로 된 어머니 또한 자식들에게 모든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위해 떠난 주말 별장 여행에서 남매는 어머니가 숨겨왔던 진실과 대면한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굿바이 레닌'이 그리는 모자 관계는 특이한 것 같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적이다. 어떤 부모, 자식 사이에도 거짓이 섞이지 않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영·유아기 자식에게 "네가 먹는 과자를 사기 위해 내가 온갖 굴욕적 영업을 하고 다닌다"고 진실되게 말해주는 부모는 흔하지 않다. 어린 자녀가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보호자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않길 바라는 게 대부분 부모의 마음이다. 세상은 각박하고 그 안에서 부모 또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딸과 아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은 훌륭한 교육 방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어머니가 수개월 만에 외출해 자본주의에 물든 마을을 둘러보는 얼굴은 새로운 것에 놀라는 아이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사진 제공=동숭아트센터>
자식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부모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전부 말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어린 내가 부모에게서 보호받았듯 나이가 든 부모 또한 자식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만큼 연약해지는 시간이 오기 때문이다. 당신이 가진 상식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일 뿐이라고 매 순간 노부모에게 직면시키는 건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 그닥 추천할 만하지 않다. 대부분은 부모가 수십 년 동안 진실로 여겼던 세계를 폭력적으로 망가뜨리지 않은 채 실제 세상과 공존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을 것이다.
"인생엔 물질보다 값진 게 있다"…유한한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굿바이 레닌'은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 중 하나가 더 우월하거나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작품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 속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릴 뿐이다. 활이 총에 밀리고, 내연기관차가 전기차에 고전하듯 옛 제도에 길들여진 사람은 새 제도를 채택한 사람에게 언젠가 자리를 내주게 돼 있다는 세상의 법칙을 이야기할 뿐이다.
헬리콥터로 운반되는 레닌 동상이 마치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는 듯하다. 한때의 권력은 새 시대의 권력에 자리를 내주게 돼 있다.
다만, 모친을 돌보는 데 모든 자원을 투입하는 알렉스의 태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떠올리게 한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라는 메시지가 난무하는 세상에서는 소중한 사람에게도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기가 쉽지 않다. 시간이란 한정된 자원을 보다 선망받는 직장이나 학벌을 얻는 데 쓰는 대신 주변인을 돌보기 위해 몽땅 바치는 건 누구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생산하고 소비하길 재촉하는 사회에선 정작 가까운 사람을 챙길 시간을 남겨두지 못하는 비극이 빈번하다. 자본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면서 인생의 우선순위가 자주 뒤바뀌어버린다. 독일 최초의 우주 비행사인 지그문트 얀이 알렉스가 창조한 이상적 세계의 새 지도자로 취임한 뒤 남기는 연설은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저 하늘 위 광활한 우주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작고 덧없어 보입니다. 가끔 목표를 잊고 방황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우린 고립된 삶이 아닌 타인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출세와 향락만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아닙니다. 인생엔 물질보다 더 값진 게 있죠. 그것은 선의와 노동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굿바이 레닌` 포스터

장르: 드라마, 코미디

주연: 다니엘 브륄, 카트린 사스, 슐판 하마토바, 마리아 시몬

감독: 볼프강 벡커

평점: 왓챠피디아(3.8),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0%)

※ 9월 24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왓챠,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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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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