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성추문 볼드모트’…그 이름을 불러도 될까

한겨레 입력 2021. 9. 25. 11:26 수정 2023. 9. 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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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의 낯선 사람][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테리 리처드슨
파격 사진으로 최고반열 올랐지만
모델 성희롱 잇따라 드러나며 추락
테리 리처드슨. AP연합뉴스

나는 지금 패션계의 볼드모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볼드모트는 <해리 포터> 시리즈 악당의 이름이다. 그는 너무나도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신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사람’(He who must not be named)이라고 부른다. <해리 포터>가 인기를 얻은 이후부터 인터넷에서는 이름을 언급하기가 좀 곤란한 사람들을 볼드모트라고 부르는 유행이 생겨났다.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정치적이거나 법적인 이유로 이름을 거론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볼드모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많은 볼드모트가 존재한다. 지금 패션계의 볼드모트는 사진작가 테리 리처드슨이다.

리처드슨이 왜 볼드모트가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가 어떤 작가였는지를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65년생인 그는 전문 교육을 받은 사진작가가 아니다. 그는 1982년 어머니한테 버튼만 누르면 되는 똑딱이 카메라를 받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92년 뉴욕으로 건너간 리처드슨은 가까운 친구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시력이 나쁘기 때문에 포커스를 조절할 수 있는 카메라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버튼만 누르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똑딱이 카메라만을 사용했다. 실내나 야간 촬영을 할 때는 카메라에 달려 있는 플래시를 팡팡 터뜨리며 찍었다. 누가 봐도 전문적인 작가가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랑받는 사진가에서 볼드모트로

패션계는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경향이 있다. 완벽하게 세팅된 화보들은 점점 지겨워졌다. 1994년 가장 젊은 잡지 중 하나였던 <바이브>는 언더그라운드에서 유명해지던 리처드슨에게 패션 화보 촬영을 맡겼다. 플래시를 마구 터뜨리며 찍은 사진들은 정말이지 제멋대로였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는 섹슈얼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 같은 것이 있었다. 1995년 영국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은 그에게 컬렉션 화보를 맡겼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음모를 그대로 드러낸 이미지로 가득했다. 1990년대는 말하자면 성적 해방 혹은 방종의 시대였다. 패션계는 섹스를 마케팅 무기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리처드슨의 사진은 패션계의 새로운 요구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곧 테리 리처드슨은 패션계가 가장 사랑하는 포토그래퍼가 됐다. 당대를 대표하는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의 광고를 찍었다. <보그>, <지큐>, <배니티 페어> 같은 패션 잡지들은 끊임없이 구애를 보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여성의 음부에 향수병을 떡하니 얹은 톰 포드의 향수 광고들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사진들은 예술적 포르노라고 부를 법했다. 만약 당신이 패션 잡지를 오랫동안 즐겨 본 사람이라면 2000년대의 어느 순간 플래시를 터뜨리며 아마추어처럼 찍은 섹슈얼한 화보들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 유행은 오로지 리처드슨이 탄생시킨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한 건 2014년부터다. 다수의 모델들이 과거 리처드슨과의 작업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폭로는 또 다른 폭로로 이어졌다. 그들은 리처드슨이 명성과 권력을 이용해 신인 모델들에게 성적인 행동을 요구했다고 증언했다. 리처드슨의 작업 방식은 사실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자마자 섹스하고 싶어지는 사진을 찍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심지어 자신도 옷을 모조리 벗은 채 나체의 모델들을 찍기로 유명했다. 그 방식은 2000년대까지는 힙하고 쿨하고 핫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대는 바뀌었다. 폭로가 이어지자 <보그>, <지큐> 등의 잡지를 거느린 출판사 콩데 나스트는 2017년 “테리 리처드슨과 작업하지 않겠다”고 사내 메일을 통해 밝혔다. 많은 패션 브랜드들도 그를 더는 고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 이후로 리처드슨은 아무런 작업물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외국 출장을 갈 때마다 구입한 리처드슨의 사진집을 몇 권 가지고 있다. 펴는 순간 날것 그대로 찍어낸 섹슈얼한 이미지들이 망막을 마구 폭격한다. 한때 그 이미지들은 감히 다른 사진작가들이 시도하지 못하던 터부를 과감하게 파괴한 혁신으로 보였다. 리처드슨이 패션계에서 퇴출을 당한 이후로 그의 사진집을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감상하는 일은 더는 가능하지 않다. 이미지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진 성적 착취와 위력의 행사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탓이다. 나는 한때 그의 사진집을 모조리 버려야 하는가 고민했다. 그러나 사진집들을 불태운다고 해서 그의 사진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리처드슨이라는 이름을 패션의 역사에서 깔끔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게 지우는 일 역시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의 사진은 패션 사진의 조류를 바꾸었다. 똑딱이 카메라를 든 수많은 젊은 작가들은 그의 사진을 흉내 내며 성장했다. 지금은 패션 사진계의 주류가 된 그들은 분명히 리처드슨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지금은 누구도 “테리 리처드슨 스타일로 찍어주세요”라는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영향을 받았지만 누구도 이름을 말하지 않는 볼드모트다.

명확한 성범죄자의 역사 어찌할까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은 계속돼

성범죄자가 만든 역사 어떻게 할까

나는 리처드슨의 이름 앞에서 몇몇 예술가들을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파블로 피카소는 “예술과 성적인 욕망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수많은 ‘뮤즈’를 이용해 역사적인 걸작을 그려냈다. 많은 여성들이 그와의 관계 속에서 예술적으로 착취당하고 육체적·정신적으로 학대를 당했다. 폴 고갱은 폴리네시아의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예술의 역사에서 아예 지워버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윤리적인 내적 지진을 여전히 겪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미성년자 성폭행범이라고 확신하지만 얼마 전 넷플릭스에 있는 그의 영화 <악마의 씨>(1968)를 다시 보며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예술적 감흥을 느꼈다는 사실을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기준으로는 명확한 성범죄자들로 가득한 패션과 사진과 미술과 영화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어떻게 다시 써야 할 것인가. 어떻게 다음 세대에 가르쳐야 할 것인가. 그러니 불편하지만 필요한 질문은 어쩔 도리 없이 계속된다. 볼드모트의 이름을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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