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서로를 '괴물'로 바라볼 때

한겨레21 입력 2021. 9. 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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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의 사건의 사회학]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수록 재난 상황에서 불안과 분노는 하루하루 부딪치는 사람들을 향해 폭발하기 시작해
매장 출입 체크는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일이 많다. 그런 경우 잘 지키는 사람만 옥죄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쉽다. 피시(PC)방에 들어가기 위해 한 시민이 QR코드 방식 전자출입명부를 기록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재난의 시대에는 불확실성이 증가한다. 사람들은 아직 닥쳐오지 않은 일에 불안해하며 대처하려고 한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서 철저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잘 대비해봤자 자신만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문제가 많다. 위험은 내 준비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준비 정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코로나19 방역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내 경우도 그렇다. 이미 2차까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마쳤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다보니 여전히 KF94 마스크를 쓴다. 그것도 그냥 귀에 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은 대중교통을 타거나 장거리 통근버스를 탈 때, 강의할 때는 머리 뒤로 고리를 걸어 마스크가 단단히 얼굴에 밀착되게 쓴다.

나 혼자 한다고 되지 않는 방역

내가 감염될까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족 중 한 명이 병원에 입원해 내가 간병해야 하던 때는 정말 무서웠다. 혹시나 나의 작은 실수로 100만분의 1의 확률로라도 감염이 되면 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가족과 병실을 공유하던 또 다른 노인 환자분들. 그분들의 생명 역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공포보다 더 끔찍한 공포였다.

강의가 시작되고서는 학생들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또 공포였다. 내가 가르치는 교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학생 한 명만 감염돼도 전체 학교가 비대면으로 전환했다. 공연예술이나 요리를 가르치는 스쿨의 경우에는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무대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이 망치질이 학업에 필수인 학생들은 휴학을 고려하게 되고 해당 학과 교수들은 한숨만 쉬었다. 나의 방심은 언제든 이런 사태를 야기할 수 있었고 그것보다 더 큰 공포는 없었다.

그러나 방역은 나 혼자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늦게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취객들이 지하철에 탔다. 그들은 바로 내 앞에 서서 ‘덴탈 마스크’를 대충 쓰고 술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드는 경우도 있었다. 가방을 챙겨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거기엔 또 코와 입을 다 내놓은 사람들이 있곤 했다. 그렇게 지하철 한 번 탈 때도 몇 번씩 다른 칸으로 이동해야 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분과 학생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영업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주변의 자영업자들을 보면 정말 눈물겹다. 혹시나 자기가 감염돼 손님에게 폐를 끼칠까봐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면 바로 검사한다. 손님들이 QR코드를 제대로 찍는지 살펴보는 것도, 어깃장을 놓으며 꼼수를 부리려는 손님을 찾아내는 것도 매우 피곤한 일이다. 자칫 방심하다 방역 당국에 걸리면 감당하지 못할 손실을 입게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밤 10시가 되면 문을 닫아야 한다.

그렇게 문을 닫고 돌아가는 길에서 그들이 목격하는 것은 기가 찬 풍경이다. 방송에서 보도한 것처럼 주점이 문을 닫는 시각이면 골목 곳곳에 모여 ‘턱스크’를 하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불금’에는 무리지어 다니는 경우도 있다. 신고해봤자 의미 없다. 경찰이나 행정 당국은 마땅한 제재 규정과 수단이 없다며 곤란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생계 수단을 걸고 정부의 방역 방침에 따르고, 조금이라도 방역 방침에 어긋나면 생계 수단을 박탈당하는데 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왜 행정 당국은 무감한가? 왜 시스템은 나를 보호하지 않고 저들을 방치하는가?

마스크 착용을 안내하는 포스터 앞으로 마스크를 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시스템은 정말 우리를 염려하는가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에 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매장마다 다르겠지만 출입구의 체온 체크와 QR코드 관리는 매우 ‘자율적’이다. 체온을 체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도 많다. 여기서는 왜 체크하지 않냐고 고객과 실랑이할 필요가 없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확진자가 방문했을 때 어떤 행정조치가 실제로 내려지는지 모른다. 말할 때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시스템은 정말 우리를 염려하는가? 아니면 우리만 옥죄는가?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사람들이 깨닫고 있다. 시스템이 방역을 실제로 통제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방역에 모든 역량을 다 쏟아붓는다고 말하지만 자기들의 관할 구역에서 눈에 보이는 부분을 형식적으로 통제할 뿐이다. 중요한 점은 내가 책임지지 않는 것이지 방역이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은 결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내 방심이 치명적인 폐해가 될 수 있다는 공포에 더해 시스템이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절망이 겹치면서 점점 사람들의 분노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향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잘 쓰고 온 마스크를 공중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면서는 벗고 침을 뱉고 세면기에서 코까지 풀고 가는가. 모처럼 간 식당에서 왜 저 사람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친구와 계산대 앞에서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내가 내야지” 하며 침을 튀겨가며 호기를 부리고 있는가.

이 사람들은 남을 보호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가? 왜 남을 보호하는 것이 이 사람의 첫 번째 윤리가 되지 못하는가? 왜 세상은 남에게 피해를 끼칠까 강박적으로 행동하며 스스로를 불행하게 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저처럼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인간들이 있는가?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수록 내 불안과 분노는 시스템이 아니라 하루하루 부딪치는 사람들을 향해 폭발하기 시작했다. “깡그리 강하게 처벌해야 해.”

존재에 대한 안전은 보장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적 안전이 질문되는 시대에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진정성’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진심을 다하지 않는 것이 비윤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저 유명한 속물/동물론이 나오게 된다. ‘거짓된 존재’라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었다.

반면 재난의 시대에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안전’이다. 안전이 위태로워지면 사람은 인간과 비인간을 가르는 윤리적 기준이 완전히 달라진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느냐 아니냐로 갈린다. 그 행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큰 행위인가 아니면 사소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소한 것이라도 큰 결과를 낳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소한 결과를 낳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해가 될 행동이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죽을죄’를 짓는 게 된다. 죄의 경중은 안전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안전하지 않다는 공포에서 파생되는 공포에 짓눌려 있기 때문이다.

속물과 동물은 재난 상황에서 유령과 괴물로

안전에 대한 공포는 ‘거짓된 존재’에 대응하는 속물과 동물이라는 두 양상을 다른 형태로 바꾼다. 유령과 괴물이다. 한편에는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만큼 다른 사람들로부터 위험을 당할까 늘 경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위험이 물러갈 때까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유령처럼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 유령들이 보기에 다른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언제든 타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괴물들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의 사소한 행동이 타인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괴물이다. 그가 진짜 위험한 행동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유령과 괴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유령이 한순간 삐끗하면 바로 괴물이 된다. 유령들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아찔한 것은 다수의 사람이 자신은 법을 최대한 지키며 자신의 사회적 삶을 희생시키며 숨죽이며 살아가는 ‘유령’이라고 인식하고 타인은 그렇지 않은 ‘괴물’이라고 생각할 때다. 이렇게 되면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그가 타인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하는 유령들의 구호는 하나로 모인다. “응징하라!”

“응징하라”는 말보다 더 지금 이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대표하는 말이 있을까? 방역뿐만이 아니다. 크고 작은 일이 발생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기만 하면 그 기사에 대한 댓글난은 단 하나의 요구로 수렴된다. “응징하라!” 이 모든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악당에 대한 응징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니 “철저히 응징하라!” 더구나 법의 현실은 응징을 통해 정의의 실현을 요구하는 감정에 비해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판결이 나올수록 불만은 더 깊어지고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많아진다.

‘위드 코로나’는 ‘위드 사람(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시민들 사이에 서로를 괴물로 바라보며 응징을 요구하는 것은 통치의 부재로 인해 내가 직접적으로 타인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재난의 시기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사람들이 갖는 것이다. 내가 소리치지 않아도, 내가 직접 항의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개입하고 중재하고 해결한다는 믿음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것이 재난의 시기다. 그를 통해 내가 감정적으로 타인에게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거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두려운 일이다.

‘감정적 거리 두기’가 필요해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안전 요구’가 ‘응징 요구’로 변해 임계치를 넘을 때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안전하게 하는 권력이 아니라 응징하는 권력을 호출한다. 응징이 사회를 더 안전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불안하게 할 것인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게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이 호출에 응답하는 ‘준비된 권력’이 출현한다면 그보다 더 두려운 ‘폭주 기관차’는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의 권력을 교체하는 선거의 때라면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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