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 북한의 겨울을 책임지는 석탄과 산업미술 도안

최희선 디자인 박사/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2021. 9.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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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으로 보는 북한 사회" 제18편 석탄과 산업미술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최희선 디자인 박사. (현)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뉴스1

(서울=뉴스1) 최희선 디자인 박사/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 한가위가 지나고 아침저녁 쌀쌀한 공기가 창문 틈으로 들어온다. 달이 바뀌면 두꺼운 의류에, 난방 기기를 손보며 월동준비를 슬슬 해야 할 것 같다.

남한보다 낮은 기온으로 더 매서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북한은 과거부터 월동을 위한 일종의 의식주 투쟁을 벌인다. 북한의 일반 가정에서는 겨울나기를 위해 민족 고유의 저장음식인 김치담그기 전투를 진행하고, 따뜻한 집을 위한 각종 땔감과 두툼한 외투와 이불을 마련한다.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주민들은 전력과 연료 부족으로 겨울나기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 북측의 산업미술전람회에서 《석유곤로 형태도안》 등 석유, 가스를 연료로 하는 화기구 디자인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석탄이 가정용 연료의 주연이 된 듯하다. 21세기 들어서 북한 당국은 주택 취사와 겨울철 난방 문제 해소를 위해 과학자들과 공장 기술자들을 독려해 새로운 에너지원 활용과 다양한 기구 개발을 독려하고 있다. 2003년에는 조선과학기술총연맹 중앙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 주민용 연료 및 연소기구 전시회’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시회에서 태양열을 활용한 식료품 가열기와 온수기, 화로식 불판곤로, 열복사체식 착화탄곤로, 가정용 메탄가스곤로 등 다양한 에너지원을 활용한 제품들을 선보였다고 알려졌다.

1984년 북한의 제1차산업미술전람회 출품작, 김일수의 《곤로사용 원형밥상 남비 형태도안》(좌) -이미지 출처: 「조선예술」(1984. 11) 평양미술대학 소속 리의복 · 리명철 공동작, 《착화탄 불통 형태도안(가정용)》(2000)(우)-이미지 출처: 『조선문학예술년감 2001』© 뉴스1

제1차산업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원형밥상 남비 형태도안≫은 당시 북한 살림집의 식생활과 주(住)생활을 엿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석유곤로로 보이는 화기를 중앙에 놓고 찌개나 국을 그 자리에서 떠먹을 수 있게 설계된 이 밥상은 식탁+음식 가열의 기능을 합친 일종의 ‘불판 식탁’이다. 조형적으로는 한국의 좌식 가구 형태와 이국적 장식무늬 원탁이 합쳐진 동서문화가 융합된 디자인으로 볼 수 있다.

2000년 국가미술전람회에서 산업미술 분야 3등을 차지한 가정용 착화탄불통도안은 우리에게 “번개탄” 상표명으로 알려진 착화탄을 사용해 취사, 난방으로 사용하기 위한 연소기구 디자인이다. 북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이 작품은 곤로식 혹은 접이식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3가지 타입의 디자인을 제안하였다. 맨 아래 접이식 연료기구 상자 옆면에는 착화탄 2개를 넣어 다닐 수 있는 서랍이 있으며, 가열 시 조리 기구를 일정 간격 떨어져 받칠 수 있는 다리 받침 4개의 보관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접이식 불통은 가정용 취사뿐만 아니라 주민 행사, 동원이 잦은 북한사회에서 야외 취용으로도 활용 가능하게 설계되었다.

송이무역회사에서 가정용으로 개발한 ‘무동력알탄보이라’ 홍보사진(좌)당 제8차 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2021년 선전화, 《더 많은 석탄을 생산하자!》(우).- 이미지 출처: 조선의 오늘, 조선중앙통신© 뉴스1

최근까지도 북한의 도시살림집에서는 석탄(무연탄)을 주원료로 하는 흑색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수혜로 복구된 지방의 새 주택의 부엌에는 난방과 취사를 겸하는 부뚜막이 보이지만, 도시 공동살림집에서는 구멍탄과 알탄을 쓰는 화기가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북한은 석탄공업성 석탄연구원에서는 초무연탄을 주민용 땔감으로 개발 보급하고 있으며, 려명기술사와 송이무역회사에서 소량의 석탄 연료로 최대의 화력을 얻을 수 있는 ‘무동력알탄보이라(보일러)’ 제품도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화학공업성에서도 ‘이온식 전기보이라’ 등의 신기술을 개발하고, 과학자들은 태양열을 활용한 가정용 에너지기구 개발로 연료 절약을 돕고 있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집권 이후 대규모 생산 가능한 무연탄 조업기지들이 만들고 있는데, 작년 신의주시에 자동화 공정 설비를 갖춘 현대적 구멍탄공장이 신축되었다고 알린 바 있다(노동신문, 2020. 8. 26). 이 공장은 “겨울용 구멍탄과 봄가을용 착화탄, 여름용 착화탄을 다량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라고 홍보한 것을 보면, 석탄은 매장량이 풍부한 북한에서 대표적 가정용 연료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는 듯하다.

북한에서 무연탄은 합성섬유의 원료로도 사용된다. 카바이드(carbide) 계열의 화학섬유인 비날론은 북한에서 특별히 ‘주체섬유’로 불리며 중요한 대접을 받는다. 면과 특성이 유사하지만 더 강한 비날론은 월북 과학자 이승기 박사가 30년대 말 발명한 합성섬유이다. 북한에서 비날론은 함흥에 대규모 비날론 공장을 세우면서 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었다. 북한의 비날론은 70-80년대 천연섬유 부족을 해결하고, 기초적인 의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화학공업에서 공을 들인 분야였다. 1984년 제1차 산업미술전람회에 도 ≪비날론 신발 형태도안≫(임숙영·강혜순, 1984)과 ≪비날론 털신발 형태도안≫(리옥실, 1984)이 출품된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1994년 경제난이 불면서 제조과정에서 많은 에너지원이 필요한 비날론은 북한에서 생산이 멈추었고, 2007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2.8비날론연합기업소 현대화 공사를 시작하면서 2010년 16년 만에 재가동하여 부활된 특이한 역사를 지닌 섬유이기도 하다.

1990년 북한 선전화에 소개된 옷감 도안들, 《우리의 비날론으로 질좋은 옷감을 더 많이!》(좌) 김정숙평양제사공장에서 생산되는 겨울이불, 결혼식이불, 봄가을이불, 침대깔개 등(우) - 이미지 출처: 「조선예술」(1990. 6), 조선의 무역© 뉴스1

함흥모방직공장, 평북 구성방직공장에서 생산한 비날론 담요, 양복천, 외투천, 목도리 제품들은 “흡습성이 좋고 질기기 때문에 시민들의 호평 속에 수요가 높다”고 북한은 홍보하며 2010년 평양제1백화점 진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체공업의 상징으로 북한에서 평가받는 비날론 제품은 시장에서 다양한 천을 접한 주민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는 받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북한에서는 김정숙평양제사공장의 견사로 만든 고급이불이 비날론 솜 제품을 대신해 인기를 끌고 있다.

2021년 7월 북한이 지난달 1일 유엔에 제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2030 의제 이행에 관한 자발적 국가 검토 보고서(Voluntary National Review·VNR)’에는 북한의 석탄에 관한 내용도 실려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정연료로 평가되는 전기, 가스를 이용하는 북한 도시민 비율은 2014년 기준 12.4%이며, 시골은 전기(0.5%), 가스(2.4%)이었다. 2017년에도 전기와 가스의 전국 평균 이용율은 인구 대비 10.3%에 불과하다고 북한은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석탄은 대부분 도시민들이 취사와 난방으로 사용하고, 지방의 주민들은 나무장작, 농업부산물을 이용한다 전한다. 남한에서는 온실가스와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퇴출될 위기인 석탄은 북한에서 고급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나 보다.

북한에 다시 혹독한 계절이 찾아오고 있다. 산업미술이 가정용 에너지원의 근본적인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지만, 열효율을 높이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어 북한 주민들이 좀 더 따듯하게 겨울을 났으면 좋겠다.

sseo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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