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된 미.. 팬데믹이 약물사망 사태 키웠다

정우진 입력 2021. 9. 25. 04: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년새 수십만명 과다복용 사망
제약사들 "중독성 없다" 마케팅
코로나이후 1년새 9만여명 숨져


미국사회가 ‘오피오이드 위기’로 불리는 역사상 최악의 마약 문제로 병들고 있다.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가 지난 20년간 무분별하게 처방된 결과 수백만명이 약물에 중독되고, 수십만명이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관련 사망자가 급증해 팬데믹이 위기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만병통치약 둔갑한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는 양귀비에서 추출되는 마약인 아편(opium)에서 유래된 것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일컫는다. 모르핀, 펜타닐 등 뇌에서 보내는 통증 신호를 차단해 고통을 못 느끼게 하는 성분이 포함돼 있다.

오피오이드가 미국에서 처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1990년대였다. 당시엔 수술이나 암 치료 등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 주로 사용됐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피오이드는 대중화됐다. 의사들은 허리, 관절 통증 같은 만성질환에도 손쉽게 오피오이드 처방을 내렸다.

문제는 약품 안전성에 대해 제대로 입증이 이뤄지지 않은 채 오남용됐다는 것이다. 퍼듀 파마, 존슨앤존슨 등 제약사는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숨기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된다”며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홍보 담당자들은 “헤로인보다 효과는 강하고 중독성은 없다”고 안심시켰다.

처방이 급증하며 공급은 늘어났다. 멕시코, 중국 등에서 오는 밀수품도 적지 않았다. 중독된 환자들을 포함해 합법적으로 약품을 처방 받기 힘든 빈곤층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불법적인 경로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오피오이드는 사실상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특히 펜타닐 등 합성 오피오이드는 헤로인보다 가격은 저렴하고 진통 효과는 50배 더 강력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불법적인 경로로 빠르게 유통됐다. 미 마약단속국(DEA)은 그 피해를 대량살상무기에 비유하고 ‘대량생산된 죽음’(manufactured death)이라고 표현했다.

중독 키운 팬데믹… 하루 255명 사망

코로나19가 미 전역에서 60만명에 이르는 사망자를 낸 동안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사망자도 전례없는 수준으로 급증했다. 미 국립보건통계센터(NCHS)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2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으로 약 9만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년 전보다 29.4% 증가한 수치로 하루마다 255명이 사망한 셈이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9년까지 약 50만명이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으로 숨졌고, 2020년에만 6만971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1999년 사망자 수(8048명)의 8배에 달한다.

의학저널 랜싯은 지난 7월 “코로나19 팬데믹이 오피오이드 위기를 심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의료체계가 흔들리면서 시민들이 익숙한 약물에 의존하게 됐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혼자 약물을 복용하는 사례가 증가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미 브라운대학 연구진이 팬데믹과 약물 과다복용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2019년과 비교할 때 2020년 사망자는 남성(72→77%), 1인 가구(45→53%), 실직자(8→15%) 집단에서 크게 증가했다. 연구진은 격리 증가, 스트레스 급증, 광범위한 경제 불안 등 팬데믹이 불러일으킨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구진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 초기 사회적, 육체적으로 고립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혼자 약을 복용했고, 개입할 수 있는 기관은 전혀 없었다”고 설명했다.

뒤늦은 대응… 합의금 ‘면죄부’ 논란

미 정부는 뒤늦게 본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오피오이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불법 유통 경로였던 남부 국경선의 경비대를 2만명으로 늘렸고 CDC는 1차 치료엔 처방하지 않는 지침을 내리는 등 규제를 도입했다. DEA는 제약사에 오피오이드 생산량을 25%가량 줄이도록 요구했다. 미 법무부는 과잉 처방한 의료진과 밀수 조직을 대거 기소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남용 예방과 중독 치료를 확대하는 방안에 1250억 달러(148조원) 지출 계획을 공약으로 제안했다.

현재 미국에선 오피오이드 관련 제약사·유통사들을 상대로 한 수천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당국은 제약사들이 부작용 가능성을 실제보다 낮게 알려 처방이 쉽게 이뤄지도록 했으며 유통사들은 시민들이 손쉽게 약품을 구할 수 있게 방치했다고 보고 있다.

최근엔 일부 제약사들이 거액의 합의금을 내고 사실상 면죄부를 받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1일 제약사 퍼듀 파마는 9년간 합의금 45억 달러(5조2000억원)를 내는 조건으로 미 연방파산법원의 파산 승인을 받았다. 소유주인 새클러 가문은 추가적인 법적 책임을 면제 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재산 대부분을 이미 역외 계좌로 옮긴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부는 “씁쓸한 결정”이라면서도 “판결이 지연되면 피해자들에게 미치는 추가적 손실이 더 크다는 점에서 승인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존슨앤존슨 등 제약사 4곳도 지난 7월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뉴욕 등 주정부와 약 260억 달러(30조원) 규모 배상금에 합의했다. 이 회사들은 위기에 대한 책임을 전부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해오다가 합의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러티샤 제임스 뉴욕주 검찰총장은 “이 회사들은 20년 넘도록 오피오이드 중독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며 “우리는 미래의 파괴를 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